쓴다는 건… ‘죽을 듯한 진지함’ & ‘순전한 장난기’[북리뷰]

박세희 기자 2023. 5. 19.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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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쓰는가
필립 로스 지음│정영목 옮김│문학동네
■ 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김한영 옮김│문학동네
“방에서 글 쓰는 게 내 삶 전부”
필립 로스 5주기 에세이 출간
글쓰기, 억압 벗어난 쾌락이자
맹렬한 비난 막는 갑옷 같은 것
탐험가 린드버그가 대통령이면?
1940년 대선 픽션도 흥미진진
현대 미국 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는 자신의 마지막 책 ‘왜 쓰는가’에서 글쓰기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한다. 문학동네·낸시 크램튼 제공

“여기 내가 있다. 날랜 손재주를 빼앗기고 그간 내가 소설 작가로서 누린 상상의 자유를 부여하던 그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고 여기에 있다.”

‘현대 미국 문학의 거장’인 필립 로스의 ‘왜 쓰는가’는 ‘미국 3부작’(‘미국의 목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휴먼 스테인’) 등을 통해 사회성 짙은 지적인 소설세계를 구축한 위대한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부커상, 퓰리처상, 전미 도서상 등 주요 문학상을 휩쓴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2017년 내놓은 것으로 그의 5주기를 맞아 번역돼 나왔다. 1960년부터 2014년까지 로스가 쓴 산문과 대담, 연설문 등을 총망라했는데 책에 실린 글들은 결국 ‘왜 쓰는가’에 대한 위대한 작가의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들의 작가’로 유명한 로스에게 글쓰기는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행위였다. “나는 삶에 대한 나 자신의 숨 막힐 듯 따분하고 좁은 관점에서 자유로워지고 꾐에 넘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닌, 완전히 전개된 서사적 관점에 상상력으로 공감하기 위해 소설을 읽습니다. 내가 쓰는 것과 똑같은 이유지요.”

이는 그를 일약 ‘스타 작가’로 만들어준 ‘포트노이의 불평’(1969년 작)에 관한 회고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한 유대인 소년의 성적 일탈을 적나라하게 그려 발표되자마자 문학계를 뒤흔든 이 책을 쓰면서 “그전 책과 옛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갈 듯한 느낌”이었다고 돌아본다.

‘포트노이의 불평’의 탄생에 관한 그의 설명은 이렇다. “‘그녀가 선했을 때’를 쓰면서 그 맹렬한 맛이 없는 산문, 괴로움에 시달리는 여주인공, 진부한 것에 대한 계속된 관심과 더불어 몇 년을 보낸 뒤라 구속받지 않고 웃기는 것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웃음을 터뜨려본 지가 오래였거든요.”

그에게 글은 맹렬한 비난에 대응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가 써온 작품들을 관통하는 핵심 테마는 ‘유대인성’(Jewishness). 본인 역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의 유대인 중산층을 깊이 탐구하고 유대인의 문제를 미국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장해 조망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작품 속 유대인에 대한 복잡한 시선 탓에 로스의 작품을 불편해하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그는 글로써 각종 비난에 대응했다. ‘유대인에 관해 쓰기’라는 산문에서, 예순 살의 유대인 남자가 한 여인과 간통하는 이야기인 ‘엡스타인’을 읽은 독자의 편지를 인용한다. 이 독자가 “이것이 유대인의 특질인가?”라고 묻자 로스는 “누가 그렇다고 했는가?”라며 “안나 카레니나는 브론스키와 간통을 하는데, 누가 ‘이것이 러시아인의 특질인가?’라고 물어볼 생각을 하는가”라고 일침을 가한다.

로스에게 글쓰기는 쾌락 그 자체기도 했다. 로스의 소설 아홉 편에 화자 혹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네이선 주커먼은 작가의 분신이자 또 다른 자아. 네이선 주커먼이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는 질문에 로스는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네이선 주커먼은 연기입니다. 그것은 모두 흉내의 기술이에요. 이 일에는 약간의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그겁니다. 변장하고 돌아다니는 것. 인물을 연기하는 것. 자신이 아닌 것으로 행세하는 것. 척하는 것.”

“글을 쓰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단 두 시간” “방에서 혼자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의 거의 전부”라고 말한 로스는 50여 년의 시간 동안 현대 미국사회, 그 안에서 벌어지는 계층, 인종, 선과 악, 결국 인간 존재의 문제를 깊고 깊게 파고들면서도 유머를 놓지 않았다. ‘순전한 장난기’와 ‘죽을 듯한 진지함’을 가장 가까운 친구들로 두었다는 그는 “하루를 끝내고 나는 그 친구들과 함께 산책을 한다”고 했다.

‘왜 쓰는가’와 함께 번역, 출간된 장편소설 ‘미국을 노린 음모’는 이 두 친구의 역량이 조화롭게 발휘된 수작이다. 책은 1940년 대선에서 대서양 무착륙 횡단비행에 성공해 미국의 영웅이 된 찰스 린드버그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누르고 대통령이 된다는 설정에서 출발, 린드버그가 펼치는 고립주의와 친파시즘, 반유대주의 정책 속 한 유대인 가족이 비극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그린다.

2004년 나온 이 소설이 미국에서 다시 한 번 열풍을 일으킨 때는 2017년,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 당선 직후다. “잘못 뽑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에 대한 끔찍한 예언이자 악몽을 보여준다. 각 권 684쪽, 2만8000원·548쪽, 1만8000원.

박세희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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