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창성의 '용산 리포트'] 21. 노무현의 2003년 일본 방문
천황 예방, 중의원 연설, 일본 국민과 대화
고이즈미 총리와 북핵 평화적 해결 합의
"한일미래 과거사에 속박되어서는 안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G7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일본을 방문합니다. 3월16일 도쿄 방문에 이어 두 달여 만의 방일입니다. 지난 7일 서울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후 12일 만의 재회입니다.
윤 대통령은 21일 기시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한층 더 발전시킬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어 이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함께 한·미·일 3자 정상회담을 갖고 북핵 억지력 강화방안 등도 논의할 것으로 보입니다.
12년 만의 셔틀외교 복원 등 최근의 한·일관계 정상화 과정을 지켜보며 잊혀졌던 2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국빈 일본방문을 소환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가르침을 깨닫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전진해 나갑니다.
‘한·일 양국의 미래가 과거에 의해 속박되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으로 격랑의 대한해협을 건너갔던 노무현 대통령의 2003년 방일외교 현장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6월 6일부터 9일까지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일본을 국빈 방문했다.
그해 2월 취임한 노 대통령은 앞서 미국을 찾아 5월14일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미 정상은 이 자리에서 북한의 핵 문제와 미군 재배치 등을 포함한 한미동맹 발전과 경제 및 통상 협력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후 직면한 최대 현안은 북핵의 평화적 해결과 한·미관계 발전 그리고 한반도 평화였다. 그가 방미 20여 일 만에, 그것도 현충일 아침에 일본으로 날아간 것도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당시 청와대 반기문 외교보좌관은 6월3일 언론 브리핑에서 “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양국간 우호증진, 무역과 투자협력 방안 등을 폭넓게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의 대일외교 추진기반 구축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한·일공조 강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실현을 위한 한·일 협력기반 강화 △재일 동포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지원방안 협의 등을 방일과 정상회담의 목표로 제시했다.
반기문 외교보좌관은 회담 의제와 관련, 북핵의 평화적 해결과 한·미·일 공조 확대를 가장 먼저 손꼽았다. 이어 한·일 FTA(자유무역협정)와 사회보장협정 교섭, 무역투자 증진 방안 등 양국관계 개선, 유엔(UN)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에서의 협력과 한·중·일 3국 협력 등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의 2003년 국빈 일본방문에는 정부에서 현재 국회의장인 김진표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윤영관 외교부 장관,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 황두연 통상교섭본부장, 조세형 주일본 대사 내외, 신정승 외교부 아·태국장 등이 수행했다. 청와대에서는 라종일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롯해 이정우 정책실장, 반기문 외교보좌관, 조윤제 경제보좌관, 윤태영 대변인, 서갑원 의전비서관 등이 공식 수행원으로 동행했다. 경제계에서는 손길승 전경련 회장을 포함해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김재철 무역협회장, 김영수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장, 김창성 경영자총협회장, 김상하 한·일경제협회장, 조석래 (주)효성 회장,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 다카스기 노부야 서울·일본클럽(Seoul-Japan Club) 이사장이 동행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빈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노 대통령은 6일 일본 도착직후 영빈관에서 아키히토(明仁) 천황 내외가 자리한 가운데 공식 환영식에 참석했다. 이어 황궁으로 아키히토 천황 내외를 예방한후 양국의 주요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이날 저녁 천황 내외가 주최하는 국빈 만찬에 참여했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일본 천황을 ‘천황’으로 부르는 것을 금기(禁忌)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장면이다.
7일에는 고이즈미 총리와 한·일정상회담 및 공동기자회견을 가진후 지한(知韓) 인사들을 만났다. 또한 도시바, 미츠이, NEC 등 대한 투자기업 CEO와 간담회를 갖는 한편 일본 경제 5단체가 공동 주최하는 간담회에도 참석했다. 노 대통령은 그리고 나카소네 전 총리 등 정계 지도자들과도 만나 한·일관계 개선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저녁에는 고이즈미 총리 주최 만찬 참석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는 이날 정상회담후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양 정상은 성명에서 “1998년 10월 발표된 ‘한·일 공동선언-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정신에 따라 한·일 양국이 과거 역사를 직시하고, 이를 토대로 21세기 미래지향적 양국관계 발전을 위해 함께 전진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이어 “양 정상은 한·일 양국이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의 성공적 공동 개최 및 ‘한·일 국민교류의 해’를 통해 조성된 한·일 우호 친선의 기조를 유지해 나가면서 신뢰와 우정을 꾸준히 심화시키고, 양국 관계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결의를 함께했다”고 했다.
양 정상은 성명에서 구체적으로 “북한 핵문제는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 및 국제적 핵 비확산 체제에 심각한 위협이라는 점에 인식을 공유했다”면서 “양 정상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물론 어떠한 핵개발 프로그램도 용인하지 않을 것임과 이 문제를 평화적,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 정상은 5월14일 및 5월23일 개최된 한미정상회담과 일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원칙을 재확인하고 앞으로 한·일간에 공조를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한·일 양국이 공유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하여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개척하고, 밝고 풍요로운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가기 위해 제반 분야에 걸쳐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천명했다.
8일에는 주일 특파원 초청 조찬 간담회, 동포 간담회, 일본 경제단체 공동 주최 오찬에 참석했다. 그리고 일본 TBS 방송을 찾아 ‘일본 국민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 날인 9일에는 수행 기자단 조찬 간담회, 일본 NHK 회견, 일본 중의원 연설, 천황 내외 작별 인사를 끝으로 도쿄를 출발해 귀국했다.
노무현 정부 국정홍보처는 방일후 한·일정상회담 성과 등을 담은 책자 ‘21세기 신동북아 시대를 연다. 노무현 대통령 방일외교(2003년 6월6~9일)’를 출판했다. 이 책자에서 ‘화해·협력·미래’를 큰 제목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국빈 방일중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미래를 위한 협력의 새 길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동북아 경제 허브에 대한 협력을 촉구했다고 소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귀국후 대국민 보고에서 “일본으로 떠날 때는 마음의 부담이 컸다”면서도 “그러나 저는 한·일 양국의 미래가 과거에 의해 속박되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으로 방일에 임했다”고 밝혔다. 그는 가장 주력했던 것은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인 발전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간 협력 강화였다고 소개했다. 동시에 이를 통해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열어 가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고이즈미 총리와의 한·일정상회담 성과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한·미·일 3국이 더욱 긴밀한 공조를 해 나가기로 합의했다고 소개했다. 앞서 진행된 2003년 5월 한·미정상회담과 6월 한·일정상회담이 모두 성공적으로 이뤄짐으로써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한·미·일 공조 체제가 더욱 확고해졌다고 평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년 전 북한의 초기 핵개발 단계에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분주하게 정상 외교를 펼쳤던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금, 윤석열 대통령이 실전 배치 단계에 있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고도화에 대응해 북핵 억지력 강화 등을 목표로 태평양을 왕복하며 한·일관계를 복원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2003년 국빈 일본방문 당시 이목을 끄는 장면들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는 일본에 도착한 6월6일 오후 숙소인 영빈관에서 아키히토 천황 내외와 고이즈미 총리, 나루히토(德仁) 황태자 내외 등의 예방을 받았다. 이어 국빈방문 의전 절차에 따라 영빈관 테라스 앞에서 노 대통령 내외는 천황의 안내를 받아 나루히토 황태자 등 황족 대표와 고이즈미 총리 등과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노 대통령은 이어 천황의 안내로 사열대에 단독으로 올라 의장대의 사열을 받는 등 국빈으로서 영접을 받았다. 이 자리에는 재일 한국학교 학생 등 100명이 한복 등을 입고 나와 태극기와 일장기를 흔들며 노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환영했다.
노 대통령 내외는 이어 아키히토 천황 내외를 예방하고,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이후 더욱 돈독해진 한·일 우호협력 관계와 미래지향적인 발전 방향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양측은 서명이 담긴 사진을 담은 액자를 비롯해 백자 사면합 한 쌍과 상감그릇 도예품 등을 선물로 교환했다.
일본 천황 내외는 이날 저녁 황궁으로 노무현 대통령 내외를 초청해 국빈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양국 각계 인사와 주일 외교사절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통해서 이뤄진 한·일 국민간의 교류와 교감은 두 나라의 내일을 위해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열정과 감동을 양국 공동의 미래를 위한 에너지로 승화시켜 나감으로써 명실상부한 한·일 동반자 시대를 열어 가야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 국회 방문 및 연설도 화제를 모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9일 국회를 찾아 중의원과 참의원 의장을 면담하고, 중의원 본 회의장에서 중의원과 참의원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일관계의 미래에 대해 연설했다.
노 대통령은 “과거는 과거대로 직시하며 국민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의 용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국민들에게 미래를 위한 협력의 새 길을 제시해야 하며, 한·일관계의 미래는 양국이 어떠한 목표와 비전을 공유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어 “그 공동의 목표로서 양국이 함께 21세기 동북아 시대를 열어 나갈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과 일본 국민과의 만남도 양국에서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일본 TBS는 8일 오후 노무현 대통령을 초청해 ‘일본 국민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생방송했다. 일본 국민 1100만명이 시청한 것으로 집계된 이 프로그램은 9.2%의 공식 시청률을 기록하며 일본에 ‘노무현 알리기’에 성공했다. 이 방송을 시청한 아키히토 천황은 9일 오후 노 대통령과 작별하면서 “어제 방송을 보았습니다. 대단히 잘 되었습니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유력지 아사히신문도 10일자 사설에서 “유화한 표정, 강한 의지, 한국의 전후세대 첫 대통령으로서 방일한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국민들에게 남긴 인상”이라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 국민과의 대화’에서 시종일관 진솔한 태도를 견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국민들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과거사 등 민감한 현안을 피하지 않았고, 자신의 철학과 정치 역정 등을 당당하게 설명했다는 관측이 나왔다.
이날 대화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답변은 오늘도 한·일 양국이 역사의 교훈으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 한국 젊은이들은 대통령에게 무엇을 기대하나?
“한국은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했으나 정신, 문화적 영역에서 원칙과 신뢰, 페어플레이 문화가 크게 발전되지 않았다. 그게 젊은이들 생각이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 국민들을 어떻게 리드해 나갈 생각인가?
“정치를 하며 부닥친 문제는 서로 편을 갈라 불신, 적대, 비난하는 것이다. 이웃 나라간 싸우고 감정이 남아 아직 다 풀어내지 못했는데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동서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 서로 반목, 불신하지 않는 사회, 토론하고 합리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사회, 국민들이 그렇게 하는 나라가 됐으면 한다.”
- 한·일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사라고 생각하는데?
“과거사는 미래를 어떻게 꾸려 나가느냐에 따라 나쁜 기억으로 되살아나기도 하고, 미래로 가는 길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미래를 잘 풀어나가면 과거사는 그야말로 역사적 기록으로만 남을 것이다. 과거사를 들먹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과거에 대한 분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기 때문에 과거를 상기시키면서 대비하려는 것이다. 과거사를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상호간 불신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가 취임식을 앞두고 고이즈미 총리를 초청하려고 했다. 그때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참배를 했다. 취소를 놓고 고심했다. 취소하면 한·일관계는 다시 얼어붙어 버린다. 당시 한·일간에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 손발을 맞춰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초청을 취소해 버리면 양국 지도자 사이에 감정이 생긴다. 그러면 이후에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이냐 하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번에도 제가 일본에 와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긴밀하게 협의하고 의기투합하고 신뢰해야 하는데 제가 과거문제를 자꾸 들먹거리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TBS는 이날 방송후 ‘국민과의 대화’ 참가자인 일본 국민 100명을 대상으로 한·일관계 미래에 관한 현장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98%가 “한·일관계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뒤 한·일 양국의 정권은 여러차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며 대한해협의 파도는 거세게 요동쳤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제104주년 3.1절 기념사에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정상화를 천명한후 일본 방문과 한·일정상회담이 성사됐다. 또한 지난 7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답방으로 12년 만에 셔틀외교도 복원됐다. 윤 대통령은 19일 오후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다시 일본을 찾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20년 전 한·일 정상외교에서 오늘날 한국과 일본 국민들에게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 필자소개 *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청와대와 윤석열 대통령의 용산 대통령실을 취재하고 있다. 지난해 ‘BH 청와대 그 마지막 15일, 북악에서 용산까지’를 출간했다. 강원도민일보 지면은 물론 네이버와 카카오 뉴스 서비스를 통해 용산 대통령실의 국정을 주제로 전국의 뉴스 콘텐츠 소비자들과 실시간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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