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마지막 개미가 사라질 때까지 [책&생각]

한겨레 2023. 5. 1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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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선동이 승한 사회에선 눈앞에 있는 것들조차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빠르게 달리는 차의 시선에는 포착되지 않는 개미들의 삶이 도로 아래에 촘촘히 숨어 있다는 것을, 개미들의 삶까지도 포함되어야만 우리 눈앞의 길이 '길'일 수 있음을, "개미"들을 위해 "조심 조심 이동"할 줄 아는 아이들의 눈에는 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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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의 시동걸기]양경언의 시동걸기

온다는 믿음
정재율 지음 l 현대문학(2023)

거짓된 선동이 승한 사회에선 눈앞에 있는 것들조차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불과 몇 개월을 사이에 두고 말을 바꾸기 일쑤인 정치권의 소식을 접하고 있자니 거기에서 전해지는 얘기들에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 뒤에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숨어 있는 것 같고,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더 찾아 나서야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그런데, 그런가. 정재율의 시를 읽다가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짜고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눈앞에 있는 것들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통해, 바로 거기에서부터 ‘이전부터 이미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고 있던 무언가’를 찾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길 한구석에 모여 앉은 아이들을 지나치지 않고 그이들을 향해 자상하게, 그리고 집중하면서 시선을 두는 시인의 방식을 다음 시에서 살핀다.

“(…) 창밖엔 아이들이 모여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자세히 보니 개미굴을 보고 있다 큰 개미들이 줄지어 지나간다 아이들 사이로 지나간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줄 몰라 제자리에 멈춰 서 있다 먹을 것을 주고 싶은데 개미는 너무 작고 차는 너무 위험하게 달린다// 조용히 해야 해// 숨을 죽인 채로 한 명이 말하자 작은 목소리로 모두가 그렇게 말한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 개미가 구멍에 들어갈 때까지 아이들은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다 아이들은 책가방을 들어 조심 조심 이동하고 코너를 돌 때까지 계속해서 이쪽을 뒤돌아본다// 아이들이 다 사라지면/ 어느새 거리는 조용해지고// 밤이 되자 밖에서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맨홀 뚜껑이 열려 있다 그 속으로 긴 케이블 하나가 들어가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따라 들어간다 이렇게나 깊게 들어갈 수 있나 싶지만 아이들이 개미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나는 맨홀에 들어간 사람들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그들이 안전하게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언제나 구멍 안쪽은 위험천만해 보이고 안전모를 쓴 사람들은 쉽게 잠들지 않는다”(‘맨홀’ 부분)

시인은 보이는 그대로를 “자세히” 지면 위에 옮겨 적는다. “개미굴” 주위에 멈춰 선 “아이들”이 조그만 “개미”들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정직하게 다 적힌다. “아이들”은 개미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차가 위험하게 달리는 도로에서 “마지막 개미가” 무사히 “구멍에 들어갈 때까지” 그 주위를 지킨다. 빠르게 달리는 차의 시선에는 포착되지 않는 개미들의 삶이 도로 아래에 촘촘히 숨어 있다는 것을, 개미들의 삶까지도 포함되어야만 우리 눈앞의 길이 ‘길’일 수 있음을, “개미”들을 위해 “조심 조심 이동”할 줄 아는 아이들의 눈에는 다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을 따를 때 우리는 “조용”하기만 한 거리에 맨홀 뚜껑이 있다는 사실을, 맨홀 안쪽에서 이뤄지는 “잠들지 않는” 사람의 노동으로 이 도시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차분하게 자세히 보는 것. 눈앞의 것에 대한 애착을 저버리지 않는 거기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것. 진실을 좇는 과정 자체도 소진되어가는 듯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어쩌면 시인이 일러준 바에서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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