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사라질까봐, 없음이 두드리는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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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41)이 5년 만에 펴낸 시집 속 58편의 시 제목은 딱 9개다.
그곳, 그것들, 그것, 이것, 그들, 그, 우리, 너, 나.
"독백이 모인다고 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우리', 108쪽)나 나와 너의 독백들이 있었음을 상기하여, 시집은 말랑하고 슬프고 명랑하고 허무한 대화록으로 제본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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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의 대명사
오은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2000원
시인 오은(41)이 5년 만에 펴낸 시집 속 58편의 시 제목은 딱 9개다. 그곳, 그것들, 그것, 이것, 그들, 그, 우리, 너, 나.
지적 유희적 시 짓기로 어느새 시력 20년을 구축한 시인의 아홉 가지 세계를 유기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그(것)들이 그(것으)로 존재하던 곳이다. 사라지기 전의 과거를 지나 사라지고 없는 현재에 있는 상태가 ‘이것’. 생몰의 동태는 너와 나의 입장처럼 순환하므로 결국 이것은 우리 모든 것의 사라지지 않는 미래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없음은 있었음을 끊임없이 두드릴 것이다.”(‘그것들’ 부분, 16쪽)
“150번하고 160번하고 같은 곳으로 가나요? 네. 그런데 이 버스는 140번인데요? 네. 기사의 목소리는 시원하고 승객의 목소리는 우렁차다. (…) 내릴 때가 되면 각자의 감정으로 괴롭다. 환승을 한다고 해도 갈 곳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170번 버스는 없어졌어요. 기사의 말을 뒤로하고 내린다. 갈 곳이 생각나지 않는다. 정류장에는 140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뒤늦게 혹은 때마침 떠오른 기억이 있다. 나는 오지 않을 170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 오지 않아서. 영영 오지 않을 거여서. 그런데? 그런데도. 바로 그런 점에서.”(‘그들’, 66쪽)
“한 버스를 탔다고 해서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뿔뿔이 흩어질 텐데… 아주 잠깐 쓸쓸할 여유도 없을 텐데…”(‘우리’ 부분, 106~107쪽)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리는 ‘나’와 ‘너’로 만나 ‘우리’로 헤어진다.
“독백이 모인다고 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우리’, 108쪽)나 나와 너의 독백들이 있었음을 상기하여, 시집은 말랑하고 슬프고 명랑하고 허무한 대화록으로 제본되고 만다. “모닥불이 꺼진 뒤에야 모닥모닥 쌓인 말들이 들렸”(‘그것’, 56~57쪽)으므로.
오은의 언어유희는 독자가 각자 더 감전될 말을 골라 사태를 감각해보자는 제안 같다. 실패하지 않는 한, 말장난이 아니라 부단한 말 걸기이자 말 듣기라 해야겠다.
그는 2002년 약관에 등단하여 5권의 시집을 냈다. 그사이 다진 시 세계의 문장론과 인간계의 관계론은 바투 닿고 있다. 고유명사로 태어나고 형용사로 자라 동사로 단짝이 된 ‘너’와 ‘너’가 부사에 탐닉하며 부끄러워지는 지경(‘너’, 130~131쪽)이 그렇다.
오은은 <현대시> 5월호 ‘나의 시를 말한다’에 “모르면 몰라도 평생 (시) 쓰게 될 것이다. 어려운 것을 피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고 썼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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