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전체성의 존재론’ 넘어 ‘타자의 무한성’으로
‘타자의 윤리학’ 재해석
타자는 홀로코스트의 ‘죽은 자’
무한의 사유야말로 애도 행위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
우치다 다쓰루 지음, 박동섭 옮김 l 세창출판사 l 1만9000원
우치다 다쓰루 (73) 는 철학 ‧ 정치 ‧ 종교 ‧ 교육 ‧ 예술을 아울러 전방위 저술 활동을 하는 일본 사상가다 . 우치다의 철학적 작업은 20 세기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1906~1995) 의 철학을 바탕으로 삼는다 . < 레비나스 , 타자를 말하다 > 는 레비나스 제자를 자임하는 우치다가 ‘스승’ 의 철학에 대해 말하는 3 부작 가운데 하나다 . 이 책에서 우치다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사유를 원용해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 을 재해석한다 .
러시아제국이 통치하던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레비나스는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해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업 시절인 1928년에는 1년여 동안 독일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레비나스는 프랑스 국적을 얻고 프랑스어로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군에 들어갔다가 독일군 포로가 돼 5년 동안 수용소에서 지냈다. 레비나스가 포로수용소에서 독서와 집필을 하는 사이, 리투아니아의 레비나스 가족은 모두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됐다. 레비나스는 전쟁이 끝나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이후 레비나스는 전체주의 폭력의 근원을 살핌으로써 그 폭력을 넘어설 길을 찾는 데 철학적 사유를 바쳤는데, 그 사유가 응집된 저작이 주저 <전체성과 무한>(1961)이다.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서구 철학의 존재론을 전체주의의 근원으로 지목한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전통 존재론은 그 ‘사유하는 나’ 바깥의 모든 것을 나의 인식으로 포섭하고 흡수한다. 서구 존재론은 내가 만든 전체 체계 안으로 모든 타자를 포획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전체성의 철학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멸하는 동일성의 철학이다. 이 동일성의 존재론이 전체주의 폭력을 산출했다. 레비나스는 이 존재론에 맞서 ‘형이상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때의 형이상학은 ‘절대적인 것’을 향해 열린 사유를 뜻한다. 존재론이 끊임없이 나로 돌아오는 자기회귀적 사유라면 형이상학은 나의 한계를 넘어 내가 잡을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는 자기초월적 사유다. 형이상학이 사유하는 타자는 무한을 간직한 존재다. 이 무한을 사유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동일성에서 풀려나 타자와 윤리적으로 만날 수 있다.
이 책에서 우치다가 주목하는 것은 레비나스 철학 언어의 ‘난해함’이다. 왜 레비나스는 그토록 난해하게 쓰는가? 우치다는 이 문제를 레비나스 사유의 근본적 곤경과 결부해 이해한다. 우리의 모든 언어는 존재자를 포섭하는 언어여서 그 언어를 그대로 쓰면 존재론의 한계에 갇히고 만다. 이를테면 ‘신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고 그 답을 찾는 작업은 ‘신’을 존재론의 언어로 잡아들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곤경을 피하는 방법으로 레비나스가 고안한 것이 ‘전언 철회’라는 서술 방식이다. 어떤 규정을 제시한 뒤 곧바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전언 철회’다. ‘리얼리티 없는 리얼리티’, ‘관계 없는 관계’, ‘포착 가능하면서도 모든 포착을 벗어나는 것’ 같은 레비나스의 말이 전언 철회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렇게 무언가를 제시했다가 바로 거두어들임으로써 진술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수수께끼가 된다. 수수께끼는 독자에게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 욕망을 가리켜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적 욕망이라고 부른다.
레비나스 철학에서 ‘형이상학적 욕망’은 ‘존재론적 욕구’와 대비된다. 레비나스가 쓰는 ‘욕망’(désir)과 ‘욕구’(besoin)는 라캉 이론에서 유래한 말이다. 욕구는 배고픔 같은 인간의 원초적인 갈구를 뜻한다. 반면에 욕망은 욕구를 충족시켜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결핍을 가리킨다. 아무리 먹어도 가시지 않는 허기가 욕망이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은 결핍이기에 무한한 운동이 된다. 레비나스는 욕구를 존재론과 연결하고 욕망을 형이상학과 연결한다. 존재론적 욕구는 모든 타자를 포식함으로써 즉각적 충족을 바란다. 반면에 형이상학적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 결핍 속에 끝없이 나를 넘어 나아간다.
이 형이상학적 욕망이 지향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외부적인 것’ 곧 무한성이며, 그 무한성을 내장한 자가 바로 ‘타자’다. 절대자-신이 타자의 가장 극명한 경우다. 신은 인간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다. 우치다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신을 <구약성서> 속 아브라함과 욥을 비교함으로써 명확히 드러낸다. 창세기 22장에서 신이 아브라함을 부르자 아브라함은 “예, 제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데려가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묵묵히 명령을 따른다. 반면에 욥은 자신에게 닥친 끔찍한 고난 앞에서 “내가 그분의 거처에 갈 수만 있다면 내 사정을 내놓고 할 말을 다 했을 텐데” 하고 탄식한다. 욥은 신과 인간 사이에 공통의 법이 있고 그 법에 따라 정의를 따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자와 인간 사이에는 공통의 법이 없다. 신은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것 너머의 무한성이다. 그 무한성의 부름에 응답하는 가운데 ‘주체’가 탄생한다. 레비나스의 주체는 존재자 전체를 장악하는 근대적 주체가 아니라 무한을 향해 나를 여는 윤리적 주체다.
신의 무한성을 지상에서 떠올리게 하는 것이 ‘타자’다. 우치다는 그 타자를 ‘죽은 자’로 해석할 때 가장 실감 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은 자야말로 결코 닿을 수 없는 ‘절대적 외부자’다. 우치다는 레비나스가 타자의 사례로 드는 ‘과부·고아·이방인’이 절멸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석할 때 “나는 내가 받은 박해에 관해서조차 유책입니다”라는 레비나스의 말이 이해된다. 자신이 포로수용소에서 박해받은 것은 맞지만 가족과 동족이 학살당할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 그러므로 그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죽지 못하는 그 죽은 자들’을 애도하고 죽은 자들이 죽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레비나스가 애도 의무를 수행하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홀로코스트를 낳은 전체성의 존재론을 넘어 타자의 무한성을 사유하는 철학하기가 그 길이었으리라.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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