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금권·철권 정치,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책&생각]
국가의 방식이 된 KGB의 방식
신흥 재벌 향한 ‘국가 통제’ 복수
최대 목표는 지정학적인 힘 복구
푸틴의 사람들
러시아를 장악한 KGB 마피아와 대통령의 조직범죄
캐서린 벨턴 지음, 박중서 옮김 l 열린책들 l 4만8000원
30년 장기집권을 바라보고 있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70)은 처음에는 “시장 개혁을 원하는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의 모습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개혁파’로서 소비에트 연방 붕괴를 이끈 보리스 옐친(1931~2007)에게 대권을 인계받은 뒤 그가 보인 모습은 크게 달랐다. 과거 동독에서 활동했던 케이지비(KGB) 요원이라는 정체성 위에서, 푸틴은 냉전 시기 은밀한 방식으로 서방을 무너뜨리려 노력했던 옛 정보기관의 방식을 새 러시아에서 되살려낸 것이다. 푸틴이 어떤 방식으로 힘과 권력을 만들어왔는지 파악하는 것은, 오늘날 러시아라는 대국이 걷고 있는 길을 이해하기 위해 핵심적인 열쇠일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했던 영국 저널리스트 캐서린 벨턴의 <푸틴의 사람들>(원저 2020년 출간)은 저널리스트 특유의 집요한 취재를 통해 푸틴과 현대 러시아의 실체를 촘촘하게 추적한 책이다. 지은이는 푸틴과 그의 케이지비 동료들, 곧 ‘안보계’ 사람들이 “어떻게 권좌에 올랐으며, 새로운 자본주의 속에서 스스로를 부자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돌연변이가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이 두툼한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문장을 먼저 꼽아 보자면, 이렇다. “푸틴을 비롯한 케이지비의 일부는 서방에게 보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자본주의를 포용했다. 푸틴 정권의 입장에서 부는 러시아 시민의 안녕보다는 오히려 권력의 투사, 즉 무대에서 그 나라의 지위를 재주장하는 것과 더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70~80년대를 지나며 소비에트 연방은 서방과의 과잉 경쟁에 따른 자원 고갈로 점차 한계를 드러냈고, 이는 결국 국가 독점과 계획 경제를 완화하는 개혁 정책 ‘페레스트로이카’로 이어졌다. 애초 고르바초프는 경제를 사회주의 국가의 한계 안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 점진적 개혁을 원했으나, 한번 도입된 자유화·시장화는 무서운 기세로 확산됐다. 새로 등장한 사업가 계급은 이 혼란기를 틈타 정부의 비호 아래 민영화된 국영 기업들을 헐값으로 손에 넣는 등 막대한 부를 쌓으며 신흥 재벌 ‘올리가르흐’로 성장한다. ‘주식 담보부 대출 경매’, 곧 민간 은행을 설립해 정부에 대출을 내준 뒤 담보로 잡아둔 국영 기업을 경매에 부쳐 인수하는 것이 이들을 키운 방식이었다. 올리가르히는 급진 개혁파인 옐친에게 권력을 쥐여주며 90년대 초중반 러시아 경제를 장악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 붕괴를 내다보고 미리 대비했던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냉전 시기 밀수든 교역이든 국내와 해외 사이의 모든 통로를 틀어쥐고 갖은 공작으로 이를 관리하며 자금을 다루던 안보 기관의 구성원들, 곧 ‘안보계’ 역시 계획 경제로는 더이상 서방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범죄조직과의 거래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비자금(‘옵스차크’)을 만들어내고, ‘우호 회사’를 만들어 그곳 ‘신뢰받는 보관인’에게 이를 관리하도록 맡기는 등 서방과의 전쟁에 필요한 ‘비가시적 경제’를 운용하는 전문가들이었다. 서방의 첨단 기술을 밀수해오는 핵심 지역이었던 동독 드레스덴에서 케이지비 해외 첩보부 소속으로 일했던 푸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으로 일하며 ‘자유주의’ 성향의 정치인인 듯 보이는 경력을 쌓았는데, 지은이는 이 때가 사실은 그가 범죄조직에게 물물교환권, 수출 독점권 등을 부여해 경화를 창출하고 이를 빼돌려 축적하는 모델을 세운 기간이라고 본다. 이후 푸틴은 공산당 보수파를 제어하기 위해 ‘안보계’의 협력이 필요했던 ‘옐친 패밀리’에게 발탁되어 모스크바로 진출한다. 애초 옐친 패밀리는 그를 ‘하수인’ 정도로 여겼지만, 푸틴은 체첸인들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모스크바 아파트 폭발 테러, 두브롭카 음악당 테러에 대한 단호한 대처, 체첸 공습 등으로 대중의 인기를 끌면서 옐친의 후계자가 된다. 지은이는 여러 정황들을 들어 푸틴 정권이 이 사건들을 고의적으로 일으켰다는 의혹도 있다고 지적한다.
정권을 쥔 푸틴의 방향은 올리가르히에 대한 안보계의 ‘국가 통제주의적 보복’이었다. 올리가르히의 손에 넘어갔던 경제 부문은 다시 국가의 손으로 돌아왔다. 2003년 당시 러시아 최고 부자였던 석유 재벌 미하일 호도르콥스키를 사기·탈세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그가 민영화로 얻어들였던 러시아 최대 석유 회사 유코스를 파산·경매에 부친 것은 그 정점이었다. 유코스의 파산 신청은 러시아 정부가 아니라 공룡 기업의 처분 과정에서 자신들의 먹거리를 기대했던 서방 은행들이 제기했는데, 이는 서방 세계가 푸틴의 새 시스템을 방조한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경매에 나온 유코스의 핵심 자회사는 급조된 ‘바이칼 금융 그룹’에 매각됐는데 거기엔 푸틴의 동맹 세력인 겐나디 팀첸코와 안드레이 아키모프가 간여했고, 나흘 뒤에는 푸틴의 핵심 ‘실로비키’(‘이너 서클’)인 이고리 세친의 기업 로스네프트로 팔렸다. “호도르콥스키의 몰락은 안보 기관 사람들에게 사실상 백지 위임장을 준 셈이 되어서, 2012년에 이르자 러시아의 국내 총생산 가운데 50퍼센트 이상이 푸틴과 긴밀하게 연결된 사업가들과 국가의 직접 통제하에 있게 되었다.” 사법 시스템 등 소비에트 붕괴 이후 민주주의적으로 이행할 것이라 기대됐던 영역들 역시 다시금 국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푸틴이 새로 구축한 시스템은 ‘국가 자본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지은이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힘을 복구”하는 것이 그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서방과의 경쟁만이 모든 것이던 냉전 시대에서 온 푸틴은 러시아의 통치 방식도 냉전 시대로 되돌렸다. 문제는 공산주의가 아닌 “국가 자본주의에선 (정보기관이 추구하는) 국가의 전략적 이익과 그들 자신의 개인적 이익 사이의 경계선을 사실상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국가의 위상 회복’이란 허울 아래 ‘이너 서클’의 검은 돈 축적이란 실체만 있는 셈인데, 과연 푸틴과 푸틴의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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