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가 우는 대목에서 독자도 눈물 흘려준다면” [책&생각]

최재봉 2023. 5. 1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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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번역가를 찾아서]번역가를 찾아서-노수경
노수경 번역가는 “내가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뭔가 전해져서 눈물을 흘리고 그걸 나만의 언어로 바꾸면서 또 한번 울게 되는데, 그 대목에서 독자들도 함께 느끼고 눈물을 흘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것”이라고 말했다. 노수경 제공

도쿄대학대학원 연구생 과정을 밟고 있던 중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해서 한국으로 피신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이어가려고 했을 땐 아이가 태어났다. 연구생 신분도 끝나고 아이를 맡길 곳도 없고 학업은 요원해졌다. 당시 유일한 말상대였던 남편에게 말버릇처럼 반복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옛날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고, 거울에 비친 얼굴도 어딘가 다른 것 같아….”

밤샘 수유를 하느라 밤이고 낮이고 정신이 몽롱하던 어느 날,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어 원서였다. <당신은 누구야? 나는 여기 있어>라는 제목의 재일동포 강상중 도쿄대 교수의 책이었다. 제목만으로도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단숨에 책을 다 읽고 나자 우리말로 번역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읽히고 싶었다. 하루에 두어 시간씩 틈을 내어 번역을 시작했다. 책을 절반쯤 번역했을 때 출판사에 연락했다. “저 이 책을 번역하고 싶은데요.” 출판사는 “그렇게 계약도 안 하고 번역하시면 안 돼요”라며 거절했다. 대신 출판사는 강상중 교수의 다른 책 <마음>을 들이밀며 번역을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된 노수경 번역가(49)의 번역 인생은 강상중 교수의 <마음의 힘> <구원의 미술관>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등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그가 무작정 번역을 시작했던 <당신은 누구야? 나는 여기 있어>는 <구원의 미술관>으로 번역돼 나왔다. 최근에는 여러 출판상을 휩쓸며 화제가 되고 있는 일본 작가 브래디 미카코의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아이들의 계급투쟁> <여자들의 테러> 등도 우리말로 옮겼다.

도쿄 인근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10년차 중견 번역가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번역하면서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생물학과에 진학하면서 막연히 과학자나 의학자로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살 때부터 어린이도서관에서 종일 시간을 보냈던 그는 특히 기묘하고 독특한 분위기의 일본 동화를 좋아했다. 학창시절 내내 산문부나 시창작반에서 글쓰기를 하던 ‘문학 소녀’였지만, “생명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궁금해서” 서울대 생물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도 생명의 기원을 파헤치기보다는 문학과 창작에 더 열을 올렸다. 문학학회와 영화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여성주의 웹진에 글을 썼고 드라마 작법을 공부하면서 김운경 작가와 노희경 작가를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남편을 따라와 자신도 공부를 이어가려고 일본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나쓰메 소세키, 요시모토 바나나 등 일본 작가들을 워낙 좋아했던 터라 일본어 원서를 읽는 기쁨이 컸다. “한국어로만 읽던 작품들을 원문으로 보니까 그 느낌과 감정이 너무 달라서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원서보다 번역본이 더 좋을 땐 ‘이게 번역의 힘이구나’ 하는 걸 느끼기도 했어요.”

생애를 통틀어 꾸준히 독서와 글쓰기를 해온 그에게 ‘생물학자’보다는 ‘번역가’가 더 운명이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번역가가 제 운명이라면 너무 기쁘죠!”라고 답했다. 그에게 번역가의 기쁨이란 “내가 읽고 나서 너무 좋은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번역을 통해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또 “내가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뭔가 전해져서 눈물을 흘리고 그걸 나만의 언어로 바꾸면서 또 한번 울게 되는데, 그 대목에서 독자들도 함께 느끼고 눈물을 흘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그에게 훌륭한 번역가의 자질을 묻자, 외국어 실력도 모국어 능력도 아닌 “공감력”이라고 답했다. 왜냐하면 “작가에게 최대한 공감하고 빙의해서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기 때문이란다.

그가 주로 번역한 강상중과 미카코는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가들이다. 강상중 교수는 일본 사회의 차별과 좌절을 몸소 겪으며 자란 재일 한국인이며, 빈곤 가정 출신으로 영국에서 보육사로 일하고 있는 미카코는 계급차별과 성차별에 저항하는 작가다. 그는 “강상중 교수는 지루할 정도로 차분하게 설명을 하는데 결국에는 중심과 핵심을 꿰뚫는 글쓰기를 하며, 미카코는 보통 일본 여성 작가들과 달리 거침없는 글쓰기가 매력”이라고 전했다.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사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그가 앞으로 출간 준비 중인 책들도 일본 소수자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사회에 메시지를 던질 예정이다. 한권은 시각 장애인이 썼고, 다른 한권은 철학으로 저항을 이야기한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구원의 미술관>
저자가 일본 NHK 방송사에서 40년째 이어지고 있는 인기 프로그램 <일요미술관>을 진행하며 만난 예술가와 예술작품에 대해 쓴 미술 에세이다. 저자의 개인적 체험과 역사가 많이 녹아 있다. 노 번역가는 “문득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에 관해 자문하는 일이 많은 분에게 추천한다”고 말했다.
강상중 지음, 사계절(2016)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인생 철학으로서의 직업론이다. 저자는 일이란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자 ‘나다움’의 표현이라고 정의하면서 역경의 시대에 일과 마주하는 자세를 일러준다. 노 번역가는 “나와 세상과의 접점을 고민하는 분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의미있게 또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분에게 추천한다”고 귀띔했다.
강상중 지음, 사계절(2017)

<아이들의 계급투쟁>
영국 하위 1%의 빈민가 탁아소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약물중독과 폭력, 섹스에 찌든 최하층의 적나라한 모습과 부모의 빈곤과 정서적 불안, 폭력과 무기력을 그대로 떠안은 유아들의 면면을 핍진하게 묘사한다. 현장에 단단히 뿌리박은 글은 “이른바 ‘수저론’이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도 던지는 함의가 크다”고 노 번역가는 소개했다.
브래디 미카코 지음, 사계절(2019)

<여자들의 테러>
“유리천장에 상처받고 좌절을 경험한 이들을 위한 책”이다.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고 유리창을 깨고 단식투쟁을 하고…. 100년 전 세상과 ‘맞짱’을 떴던 세 여성의 삶을 교차 서술했다. ‘박열의 부인’으로 알려진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 아일랜드 독립군 저격수로 활약한 마거릿 스키니더가 바로 그들.
브래디 미카코 지음, 사계절(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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