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어떻게든’ 새긴 기억의 무늬, 다음 시절 살아갈 힘
‘기억의 왈츠’ 등 7편 수록 소설집
강촌 배경 ‘사슴벌레식 문답’
따옴표 없는 독특한 대화체
실패·부적응 과거 새롭게 전환
권여선의 글은 일상의 미묘한 감정들을 주파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기억의 무늬는 망각된 시간과의 조우를 통해 새롭게 읽혀진다.
그의 새 소설집 ‘각각의 계절’은 제15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인 ‘기억의 왈츠’를 비롯해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 ‘실버들 천만사’, ‘하늘 높이 아름답게’, ‘무구’, ‘깜빡이’,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등이 수록됐다. 한 시절과 계절에 대한 이별이자 지금을 살아내기 위한 ‘다시 쓰기’의 과정이다.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된 ‘사슴벌레식 문답’은 춘천 강촌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30년 전 시원시원한 성격인 부영과 규칙적이고 예의바른 경애, 상냥하고 조심성이 많은 정원, 그리고 술을 좋아하고 즉흥적인 소설의 화자 준희는 강촌으로 충동적인 여행을 떠났다. 숙소 주인은 방충망도 있는데, 어떤 틈을 비집고 숙소에 들어왔는지 모를 사슴벌레 한 마리에 대해 “어디로든 들어와”라고 말한다.
이같은 문법은 소설 전체를 장악한다. 정원과 준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을 이어간다. 가령 ‘어떻게’, ‘무엇이’, ‘왜’라는 물으면 ‘어떻게든’, ‘무엇으로든’, ‘왜든’이라고 대답한다. “너는 어떤 소설을 쓸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거야”라는 문장이 모든 것을 함축한다. 운명을 스스로 만들고 밀어붙이는 의지와 욕망은 때로는 불분명한 것에서 나온다. 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연극인을 꿈꿨던 정원도 정작 배우나 감독 중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는 몰랐다.
10년 전 스스로 세상을 떠난 정원의 20주기 추모 모임에 간 사람은 올해도 준희 혼자였고, 그에게 30년 전 춘천 가는 기차 안에서의 기억은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깜깜한 터널을 통과해 강촌에 도착했다. 다시 깜깜한 터널을 통과해 서울로 돌아온 것처럼 규칙적인 소음만 귓가에 맴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는 거짓 간첩 진술로 관계가 파탄난 부영과 경애와의 대화로 이어진다. “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아”
권여선은 소문난 애주가로 통한다. 그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처럼 술과 인생에 관한 내용은 이번 소설에도 다수 등장한다.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사회 부적응자인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 학생운동 풍경을 술에 취한 모습으로 응시하면서도 여전히 이어지는 국가 권력에 의한 부조리함 등 현실에 대한 환기를 통해 한 세대가 공유하는 무력감을 표출한다. 정태춘·박은옥 ‘북한강에서’, 김민기 ‘차돌 이내몸’ 등 흘러간 옛 노래가 자주 등장하는 것 또한 놓칠 수 없다.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담은 곡선들이 문장에서 유려하게 흐른다. 대화체에 별다른 따옴표가 없는 것 또한 권여선 소설의 특징이다.
마지막 작품 ‘기억의 왈츠’도 앞의 소설처럼 마치 작가의 이야기인 듯 느껴졌다. 그만큼 몰입도가 높다.
권 작가는 김유정문학상 수상소감에서 “이 소설은 도저히 빨리 쓸 수도, 한시바삐 완성시킬 수도 없었다. 기억의 속도가 글의 속도보다 느렸기 때문이고, 기억의 무늬가 글이 따라잡기엔 생각보다 섬세하고 미묘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어두운 청춘의 한 시절 만났던 ‘경서’가 꼭 편하지만은 않았다. 경서는 대학원 동기중에서 가장 철이 든 축에 속했고 문화 현상이나 예술작품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경서에 대해 “나의 내부에서 치명적인 진실을 캐낼까”, 아니면 “아무것도 캐내지 못할까”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려움을 느꼈고, 무엇보다 두려웠던것은 “내가 경서라는 인간을 도저히 읽어내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이었다. ‘나’는 젊은 날 경서와의 관계 속 철통같이 지켜내려 했던 모순과 실패했던 왈츠를 기억속에서 되찾는다. 마침내 하나 둘 셋,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도는 왈츠의 춤은 잿빛 수의의 기억과 두 겹의 차원을 동일한 무늬로 돌려놓는다.
이번 소설집의 제목은 ‘태극기’를 소재로 한 단편 ‘하늘 높이 아름답게’의 마지막 문장인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필요하지요”에서 가져왔다. 권여선 작가는 “어느 시절을 살아내게 해준 힘이 다음 시절을 살아낼 힘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며 “다음 시절을 나려면 그 전에 키웠던 힘을 줄이거나 심지어 없애거나 다른 힘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각각의 계절과 시절, 지나간 노래의 이야기가 단단하게 연결된 것처럼 다시 들린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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