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 상상력의 실종과 싸구려 정치

이용욱 기자 2023. 5. 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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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취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선배에게 따끔한 말을 들었다. 술자리에서 정치 현안에 대한 가벼운 토론이 벌어졌다. 선배들의 대화를 듣다가, 무심코 “~는 그런 거 아닌가요?”라고 했다. 그러자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정치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술이 확 깼다. 당시 대화 주제가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선배의 충고는 틀리지 않았다. 지켜볼수록 정치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해관계와 지지층이 다른 정치세력들이 현안에 대해 부딪치고 합의점을 만드는 과정은 간단할 수 없었다. 법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영역인 만큼 경험과 많은 정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했다.

이용욱 정치에디터

‘이런 게 정치구나’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일이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장외투쟁 중 국회로 전격 복귀했다. 김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떠나기 직전 이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민생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국회 등원을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사사건건 대립했던 야당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 대통령이나, 이를 수용한 야당 총재 모두 상상력과 유연함을 발휘한 것이었다. 수많은 변칙과 꼼수가 난무하는 정치의 세계에서 지금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4대 개혁법을 놓고 협상을 벌일 때다.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이부영 전 의원은 협상이 막힐 때마다 당직도 없던 유인태 전 의원을 불러들였다. 그가 사리 판단과 이해관계 조정을 잘한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일할 때 대통령 앞에서도 조는 모습이 노출돼 ‘잠수석’으로 불렸던 유 전 의원이 허허실실 이미지와 달리 정치적 상상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기자는 요즘의 정치가 그리 어렵지 않다고 감히 생각한다. 정치권 곁불 좀 쬐었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정치인들의 빈곤한 자질과 얄팍한 언행이 정치의 세계를 단순무식하고 저렴하게 만들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극단적 편가르기와 팬덤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이에 기생하는 정치인이 늘어나면서 대화와 타협을 끌어내는 정치적 상상력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내 편은 선이고 다른 편은 악인데, 종합적이고 이성적 판단이 왜 필요하겠는가. 팬덤정치가 상상력 부재를 초래했는지 상상력 부재가 팬덤정치로 이어졌는지 선후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건 강성 지지층에 휘둘리는 요즘 정치인들이 어떤 말을 할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김남국 의원의 코인 투자 의혹은 저렴한 정치판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치의 세계에서 영민함과 거리가 멀었던 김 의원은 가상자산 투자에서 숨은 실력을 드러냈다. 청문회와 상임위 중 수도 없이 코인 거래를 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래놓고도 “상임위 거래는 몇천원 수준”이라고 했다. 국회가 얼마나 우스웠으면 몇천원 수준 거래까지 굳이 상임위 중 했단 말인가. 김 의원은 얼토당토않은 변명으로 매를 버느니, 김대중·노무현의 민주당을 욕보이고 정치판을 싸구려로 만든 것을 부끄러워하며 머리라도 찧는 시늉을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사법 리스크에 얽매여 각종 스캔들에 제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이재명 대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손 놓은 거대야당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야당이 이 모양이니, 윤석열 대통령은 맘 놓고 폭주한다. 반대편을 무시하고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는 막가파 통치는 국정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무지하니, 믿을 건 검찰에서 배운 완력뿐이다. “국정기조에 맞추지 않고 애매한 스탠스를 취한다면 과감하게 인사조치하라”고 공직사회를 협박하고, 압수수색 등 검찰 수사로 정적과 상대를 겁박한다. 이런 대통령의 거수기 역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집권여당이 국정 중심을 잡기를 기대하는 것도 난망한 일이다.

이런 정치를 어떻게 바꿀지 딱히 떠오르는 답은 없다. 다만 정치가 지금보다 복잡하고 품위 있는 것이 됐으면 한다. 음습한 뒷거래 정치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그래도 정치인들이 스스로 정치판의 격을 떨어뜨리는 자해극을 벌이는 것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삶은 이리도 복잡한데, 국정을 총괄·조정하는 정치가 단순해지고 저렴해지는 현실은 정상이 아니다. 국민 모두의 삶, 국가 미래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정치의 영역은 지금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어야 마땅하다. 용산과 여의도로부터 의표를 찔리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다.

이용욱 정치에디터 woo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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