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

기자 2023. 5. 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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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오해를 많이 받는 사람 중 하나다. 대표적인 것 하나는 그가 ‘정치를 악인이 더 잘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공적 이익보다 사적 이익과 파당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문제가 없고,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의 윤리성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고도 한다. 과연 그랬을까? 정치에서 도덕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일까?

이관후 정치학자

일반적으로 마키아벨리는 ‘정치에서 도덕을 분리한 사람’으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그의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외양’과 ‘실재’의 구분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정치가 본질적으로 단일한 규칙과 진리가 작동하는 일원론적 세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는 어제 옳은 것이 오늘도 옳은 것은 아닌 것이다. 정치에서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항상 도덕적으로 옳거나 일관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면 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마지막 부분 때문에, 정치에서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마구 저질러도 되는 것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오해다. <군주론>을 한 번이라도 자세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금방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것은 의도적으로 비도덕적인 행위를 할 때라도 그것이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불가피한 행위인 것처럼 ‘외양’을 잘 꾸밀 필요가 있다는 쪽에 가깝다. 그가 경고하려고 했던 것은 ‘나는 선한 목적을 갖고 있으니, 지금 하는 일로 남들에게 오해를 받더라도 굳이 설명하거나 변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정치적으로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마키아벨리에게 도덕적 외양을 띠는 것은 무시될 만한 일이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정치의 매우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였다.

이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 ‘정치는 악인이 잘하는 것’이라든지, ‘정치는 그 수단과 목적에서 본질적으로 도덕과 관계없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지 않다. 마키아벨리 본인에게 정치의 목적은 단일했다. 그것은 ‘공공선’이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종종 ‘위선’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때의 위선은 개인이 사적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공공선에 부합할 때의 위선이다.

위선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기만에 능하고, 이득에 눈이 어둡다고 보았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모든 사람들을 악인으로 간주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랬다면 그가 ‘도덕적 외양’을 띠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미국 헌법의 기초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매디슨은 “인간들이 모두 천사라면 정치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와 매디슨은 ‘악마들의 세계에서도 정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란 것에 동의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민주당에서 “우리 당은 도덕주의가 너무 강하다”는 발언이 나왔다. ‘진보라고 꼭 도덕적이어야 하느냐’는 식으로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는 없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일리가 있다. 문제는 국민들도 그렇게 보고 있느냐는 것이다. 얼마 전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이 민주당의 도덕성을 국민의힘보다 더 낮게 보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지난해 8월 ‘새로고침위원회’ 보고서에도 이미 나왔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마키아벨리라면 이런 결과를 놓고 정치와 도덕은 구별되니 문제가 없다고 평가할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매우 무지하고 위험하며 현명하지 못한 행위라고 지적할 것 같다. 한국인들의 정치적 감각에서 ‘도덕성’이라는 평가 기준이 아예 사라져버린다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한국인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자신은 적당히 이기적이면서도 정치인들은 공공선을 추구하기를 원한다. 게다가 이것이 맞든 틀리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당들에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다. 그걸 부정하고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그래서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이다. 이런 비현실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 방어에 급급한 나머지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야당이 도덕성을 포기하고도 정치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유능함’에서 압도적으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때일 것이다.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야당은 그 부분에 역량을 집중했던가, 아니면 ‘야당 탄압’이란 도덕적 무기로 싸웠던가? 이제라도 그 프레임을 벗어던지고 경제와 외교안보, 민생과 갈등관리에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고 결심했다면 박수를 보낼 일이다. 아니라면, 이것은 자멸의 시작일 뿐이다.

이관후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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