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마음치유] 또다시 후회하더라도

2023. 5. 18.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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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면허를 딴 직후 대학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일 년을 보냈다.

그 당시 대학병원 인턴이 가장 많이 하는 일 중 하나는 '필름 찾기'였다.

진단과 치료 목적으로 찍은 환자들의 엑스레이, CT, MRI 영상이 디지털이 아닌 필름으로 인화되던 시절이었고, 큰 대학병원일수록 영상의학자료를 물리적으로 방대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으로 인턴 성적을 매기진 않았지만 이 일을 잘 수행할수록 인턴의 실력도 높게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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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초년생에 “조금 더 버텨보라” 훈계
식상해도 인생 선배로서 최선의 조언
의사 면허를 딴 직후 대학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일 년을 보냈다. 밀레니엄이 시작되기도 전이다. 그 당시 대학병원 인턴이 가장 많이 하는 일 중 하나는 ‘필름 찾기’였다. 진단과 치료 목적으로 찍은 환자들의 엑스레이, CT, MRI 영상이 디지털이 아닌 필름으로 인화되던 시절이었고, 큰 대학병원일수록 영상의학자료를 물리적으로 방대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곳에서도 지하의 광대한 공간과 병원 건물 곳곳에 필름들이 나뉘어 보관되어 있었다. 외래 진료와 수술, 때로는 연구에 필요한 필름을 보관소에서 하나하나 찾아내어 필요한 장소에, 적시에 준비해두는 것이 인턴의 필수 업무였다. 물론 이것으로 인턴 성적을 매기진 않았지만 이 일을 잘 수행할수록 인턴의 실력도 높게 평가되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필름을 찾아서 진료실과 수술방에 비치해두는 것은 환자 치료에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나는 이 업무에 그리 능통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갑자기 수술방에서 필요한 환자 필름이 있으니 찾아오라는 메시지를 받고는 하던 일을 멈추고 병원 지하로 뛰어내려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지시받은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을 한참 지체한 후에야 필름을 찾아들고 수술방으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구석진 계단에 혼자 앉아 울었다. 인턴 생활이 힘들기도 했지만 서럽고 화가 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의과대학 공부하고 면허 따느라 청춘을 다 보냈는데 고작 필름 찾는 일이나 해야 하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의과대학 선배가 수석 레지던트였는데 당직실로 나를 호출해서 불려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일을 제대로 못 했다고 질책을 들었다. “요즘 인턴들 근무 환경이 편해져서 강하게 단련이 안 되는 것 같아!”라는 훈계도 들었다.

식상한 말이지만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환자 필름도 제대로 못 찼는다고 꾸중 듣던 내가 사회 생활을 갓 시작한 청춘들에게 훈계를 하고 있느니 말이다. 6개월 근무했던 직장을 그만둘 거라는 20대 여성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단순 업무나 하면서 내 소중한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비록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도 그걸 꾸준히 해낸다는 건 다른 업무도 성실하게 잘 해내는 사람이라는 징표를 얻는 것이니 최소한 일 년은 버텨 보라고 나는 조언했다. 그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 너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해”라고 내가 응원해 줄 거라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가 진료실을 나간 뒤에 내가 얼마나 부족한 정신과 의사인가 하고 반성했다. 기성세대의 훈계나 듣자고 상담하러 온 것도 아닌데, 어쭙잖은 조언으로 그녀의 기분을 더 우울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의 하찮음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면 언젠간 자신의 잠재력을 펼칠 수 있는 일이 주어질 거란 기대가 없기 때문에 괴로웠던 것인데 그 심리를 내가 제대로 읽어주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에 그가 다시 찾아오면 과연 나는 다르게 조언할까?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능력에 걸맞은 일을 찾아보라고 말해 줄 수 있을까? 아마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비록 훈계처럼 들려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테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괜한 말 말고 응원이나 해줄걸’ 하고 또 후회하지 않을까 싶다.

김병수 정신건강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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