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혐오’ 드러낸 섬뜩한 ‘보도 폭력’
조선일보 “죽음 안 막아” 왜곡 보도
보수단체와 여권은 ‘방조설’ 확산
언론·인권단체 “명백한 폭력” 비판
민주노총 건설노조 간부의 분신 사망 사건과 관련해 조선일보가 ‘자살 방관’ 의혹을 제기한 것을 두고 최소한의 보도윤리조차 지키지 않은 ‘2차 가해’라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누군가를 패륜아로 낙인찍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당사자나 경찰 등을 통해 최소한의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 행태, 윤석열 정부의 반노동 기조, 사회 일각의 노조 혐오 정서가 맞물려 벌어진 ‘보도 참사’라는 지적도 나온다.
조선일보는 지난 16일 인터넷판 기사와 17일자 지면 기사를 통해 노동절이던 지난 1일 고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이 분신할 당시 곁에 있던 노조 상급자 A씨가 양 지대장을 말리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A씨가 자살을 방관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기사에 언급된 A씨는 민주노총 건설노조 강원지부 부지부장 홍모씨다. 홍 부지부장은 시민 4명, YTN 기자 2명과 함께 사건 현장에 있었다.
건설노조와 경찰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홍 부지부장은 사건 당일 오전 9시12분 “검찰청 주차장에 와달라”는 양 지대장의 전화를 받았다.
양 지대장은 6분이 지난 오전 9시18분 노조 간부들의 단체대화방에 분신을 암시하는 유서를 올렸고, 노조 지부장은 즉시 광역수사대에 신고했다. 홍 부지부장은 양 지대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홍 부지부장은 오전 9시20분쯤 양 지대장이 있는 현장에 도착했다. 양 지대장의 몸에는 이미 휘발성 물질이 뿌려진 상태였다. 한 손에는 라이터, 다른 손에는 휘발성 물질이 담긴 통이 들려 있었다. 오전 9시31분 노조 지부장은 양 지대장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기가 꺼져 있자 홍 부지부장에게 연락했다. 홍 부지부장은 당시 통화에서 “(양 지대장이) 시너를 뿌려놓고 있다. 내가 말리고 있을 테니 빨리 와달라”고 했다. 노조 지부장은 홍 부지부장에게 “(양 지대장을) 어떻게 해서든 말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홍 부지부장이 노조 지부장과 통화를 하는 사이 양 지대장은 오전 9시36분 자신의 몸에 한 차례 더 휘발성 물질을 뿌린 뒤 불을 붙였다. 경찰 관계자는 전날 경향신문에 “양 지대장이 주변 바닥 등에 먼저 시너를 뿌리고 손에 라이터를 든 채 동료와 주위 사람들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한 뒤 몸에 다시 시너를 뿌리고 분신한 것”이라고 했다. 경찰은 또 “바닥에 시너가 뿌려진 상황에서 곁에 다가갔다면 말리던 사람도 함께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기사 말미에 ‘민노총은 양씨 시신을 서울대병원에 안치해두고 무기한 장례를 진행 중이다. 빈소에 적힌 상주는 장옥기씨(건설노조 위원장) 1명’이라고 썼다.
‘악재’ 돌파구 필요한 여권 보수 언론발 의혹 재확산
그러나 경향신문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양 지대장 빈소가 꾸려진 당일인 지난 4일 촬영한 사진을 보면 상주 이름에는 양 지대장의 친형 양모씨의 이름이 맨 위에 쓰였다.
장옥기 건설노조 위원장의 이름은 그 아래 적혔다.
건설노조 측은 “유가족 대표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위임장을 가지고 (빈소) 계약을 했다”며 “언론 노출을 꺼리는 아내분 대신 형님이 상주로 정해지는 1시간여 동안 장 위원장의 이름이 상주로 띄워졌다. 빈소가 공식적으로 차려지기 전 상황을 조선일보가 16일자 기사에 쓴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양 지대장 부고장에 적힌 후원금 계좌의 명의자가 ‘전국건설노조’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노조장으로 치러지는 양 지대장 장례의 조의금을 ‘투쟁기금’으로 받는 것은 유가족이 이미 동의한 것이다. 노조 관계자는 “투쟁 후원기금은 양 열사와 관련한 투쟁에 사용된다. 사용처는 모두 유가족께 공유·확인드린다”고 했다.
조선일보가 불을 댕긴 자살방조 의혹은 정치권을 타고 확산했다. 17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에 이어 ‘친윤(친윤석열)계’ 이용 국민의힘 의원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누군가의 목숨으로 정치적 이익을 보려 들지 말라”고 했다.
보수 성향 시민단체인 신전대협은 같은 날 홍 부지부장을 자살방조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여권이 조선일보 보도를 반노동 공세를 강화하는 땔감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관측이 나왔다.
조선일보 보도가 윤석열 정부 들어 노골화한 ‘반노동’ ‘노조 혐오’ 정서에 편승한 기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언론과 여권이 주거니 받거니 의혹을 부풀리고 검찰 고발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이 연상된다는 반응도 있다.
언론·인권단체들은 조선일보 보도에 대해 “명백한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윤창현 언론노조 위원장은 18일 경향신문과 통화에서 “취재원 복수 검증이 이뤄지지 않았고 현장에 가장 근접해 있는 당사자들 목소리가 제외된 함량 미달의 음모론”이라며 “현장에 있던 언론사 기자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했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이 같은 보도는 단순 의혹 제기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바로 옆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사람을 두고 ‘동료가 죽는 것을 그냥 지켜봤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며 “강기훈 유서 대필 의혹 사건 때도 가까운 관계에 있던 사람을 잠재적 혐의자로 만들어 (그 사람이) 30년 가까이 고통을 겪어야 했다”고 말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정부·여당이 건설노조를 ‘건폭’이라고 몰아세우는 과정에서 노조원이 죽음으로 내몰린 것이니 정부·여당에 불리한 악재”라며 “정치권이 보수 언론발 의혹을 재확산하면서 악재를 돌파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유진·김세훈·강은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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