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없는 진보언론의 꿈, 박정희 쿠데타세력에 짓밟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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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삼촌도 외삼촌도 국회의원이었다.
일찍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조용수와 민족일보> 를 쓴 원희복 기자에 따르면, 조용수는 "1959년 조봉암 구명운동을 벌이며 사고의 전환을 맞는다." 진보 정치인 조봉암을 사형시키지 말라고, 일본에서 22만명의 서명을 받아 이승만에게 보냈다. 조용수와>
조용수는 한국으로 돌아와, 혁신계 정치세력의 일원으로 7·29 총선에 출마하고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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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다]
[나는 역사다] 조용수 (1930~1961)
친삼촌도 외삼촌도 국회의원이었다. 일찍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우익 학생활동에 앞장섰다. 19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민단에서 활동하며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 등 우익계 청년운동을 벌였다.
<조용수와 민족일보>를 쓴 원희복 기자에 따르면, 조용수는 “1959년 조봉암 구명운동을 벌이며 사고의 전환을 맞는다.” 진보 정치인 조봉암을 사형시키지 말라고, 일본에서 22만명의 서명을 받아 이승만에게 보냈다.
1960년 4월 혁명이 터졌다. 조용수는 한국으로 돌아와, 혁신계 정치세력의 일원으로 7·29 총선에 출마하고 낙선했다. 혁신계의 주장을 알리는 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자금을 모았다. 민단 개혁파 인사, 특히 재일동포 사업가 박용구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이듬해 2월8일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고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민족일보>는 창간 석달 만에 4만여부를 발행하는 등 지식인과 학생층의 지지를 받았다. 보수 쪽은 그만큼 민족일보를 싫어했다. 3월2일 장면 정부 사람이 인쇄를 방해해 신문이 나오지 못했다. 산업은행장의 비리를 폭로했다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고, 기자가 공무원에게 폭언을 듣고 취재 현장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당시 민족일보와 혁신계 인사에게 미행과 테러가 많았다.” 혁신계 정치인이었던 윤길중의 증언이다.
박정희 군부세력의 첫번째 희생자였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틀 뒤 조용수와 민족일보 간부들이 잡혀들어갔다. 5월19일부터 신문이 나오지 않았다. 진보언론의 짧은 실험이 이렇게 중단됐다.
8월28일 조용수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평화통일과 남북협상을 주장”했으니 간첩이라는 억지 논리였다. 국제적으로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지식인들이 활발히 움직였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은 군부가 두려워 침묵했다. 그해 12월21일 조용수는 사형당했다.
1992년에 동생 조용준이 조용수 재판 기록을 정부에 요청했으나, 이 재판의 자료만 유독 폐기됐다는 답변을 받았다. 1998년 처음 추도식이 열렸고, 2008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청년 언론인 조용수의 상을 테라코타로 빚어보았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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