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선의 풀무질] 미국 정신은 독립 정신이다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에 갔다. 백악관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열창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환호하며 돈 매클레인이 사인한 통기타를 선물했다. 윤 대통령은 미 의회에서 영어 연설도 했다. 가난했던 한국이 이제 선진국이 됐으며 그것은 미국 덕분이라고 감사 인사를 올렸다. 자유의 나침반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당, 공화당 가릴 것 없이 미 의원들이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냈다.
나는 놀랐다. 윤 대통령이 이렇게 영어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지 몰랐다. 영어랑 노래로 먹고사는 내가 봐도 수준급이었다.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외교의 목적이 애교라면 이번 워싱턴 방문은 대성공이다. 이토록 진심으로 미국에 대한 애정을 어필하는데, 어느 미국인이 싫어할까? 흐뭇할 수밖에 없다.
통기타를 받고 기뻐하는 윤 대통령의 얼굴을 보니 6년 전이 떠올랐다. 나는 동두천에서 카투사로 복무 중이었다. 미2사단 무도회에서 공연했다. 미군 장군님들이 좋아하시는 레너드 스키너드의 ‘스위트 홈 앨라배마’(Sweet Home Alabama), 닐 영의 ‘로킨 인 더 프리 월드’(Rockin’ in the Free World) 등을 노래했다. 한미 친선 주간에는 미군 병사와 함께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을 연주했다. “같이 갑시다”(Katchi Kapshida)라는 한-미 동맹의 슬로건을 체현한 공로로 포상휴가를 두둑이 받았다.
직속상관이었던 몽고메리 중위가 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미국 현악기 밴조(banjo)가 들려 있었다. 컨트리 음악을 사랑하는 아칸소 출신의 친구였다. 나랑은 동갑이고 음악 취향도 통해서 업무가 끝나면 자주 어울렸다. 그는 소위 ‘오버 스펙’인 내가 자신의 부하 병사인 것을 너무나도 재밌어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했다. “내 카투사 범선이 나보다 미국사를 더 잘 알아 하하.” 작전명령을 쓸 때 영어 문장을 다듬고 문법 고치는 일을 내게 맡겼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30분의 1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면서, 그의 일을 묵묵히 대신했다.
밴조를 받았을 때 기분이 묘했다. 친구의 호의는 당연히 고마웠다. 하지만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로 나는 굴욕감을 느꼈다. 관계의 불평등에서 오는 불편함이었다. 선물보다는 포상, 하사품처럼 느껴졌다. 왠지 150년 전에는 아칸소에 사는 몽고메리라는 백인 주인이 흑인 노예에게 비슷한 밴조를 선사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그 밴조를 소중히 간직하지만, 한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윤 대통령이 통기타를 연주할지는 모르겠다. 미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받은 통기타. 신중현의 미8군 엔터테인먼트로 시작해서 비티에스(BTS)의 케이팝까지 이어진 한류의 상징이기도 하다. 미 제국의 모범생이자 우등생으로서 한국이 이룬 업적이다. 나는 바이든의 통기타와 몽고메리의 밴조를 번갈아 보면서 고심했다. 나의 복잡한 심경은 어디서 오는가? 미국을 제2의 모국처럼 사랑하고, 미국 음악인 로큰롤이 직업인 내가 도대체 왜 ‘아메리칸 파이’ 윤석열 버전을 반겨 듣지 못할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의 자유주의 질서와 중국·러시아의 반자유주의 질서가 대립하고 있다. 바야흐로 신냉전이다. 구한 말, 중국의 패권이 끝나고 미국, 일본 등 해양세력이 득세할 때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서세동점의 시대가 끝나고 중국이 재부상하는 21세기. 한반도는 다시 열강의 각축장이 됐다. 전세계에서 가장 핵전쟁의 위험이 큰 곳이다.
이때 윤석열 정부는 미국을 맹종하기로 선택했다. 네오콘의 언어를 구사한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미국을 절대선으로 여긴다.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의 선비들처럼 작은 미국, 제국의 의로운 민족이 되고자 한다. 미국의 원조 혈맹인 프랑스마저도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있는 지금.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충실한 심복이다.
하지만 진짜 미국 정신은 독립 정신이다. 1775년, 자유 선언, 인권 선언, 민주 선언도 아닌 ‘독립 선언’으로 건국된 나라다. 진짜 친미라면, 진짜 미국처럼 되고 싶다면, 미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윤 대통령의 ‘아메리칸 파이’ 열창이 나의 카투사 시절만큼 민망한 것은 그것이 너무나도 한국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신에 어긋나는 사대주의다. 나는 한국이 더 미국처럼 되었으면 한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외교를 바란다. 이제 미국을 졸업할 때가 되었다. 그것이 한반도 평화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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