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맞춤형 교육이라는 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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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생활
김민제
노동·교육팀 기자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학원에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한국에서 대입을 치른 여느 10대들과 마찬가지로. 영어와 수학 위주로 3~4명씩 소규모로 수업을 듣는 공부방, 한반에 20명 이상 몰린 학원 등을 전전했다.
개중에는 특이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학원이 있었다. 영어학원이었는데, 학원에서 수강생들은 각자 자율학습을 했다. 강의실 양쪽 벽에 컴퓨터가 설치된 긴 책상이 붙어 있고, 수강생은 그 앞에 앉아 원장이 촬영한 강의 영상을 봤다. 강의 목록 중 각자 들어야 하는 것을 골라 들으면 됐다. 일종의 비대면 강의였는데, 이런 식이면 인터넷 강의를 듣지 왜 학원까지 다녔나 싶겠지만 나름의 차별점은 있었다. 조교들이 수강생들의 수업 태도를 살피고 숙제를 검사했기 때문이다. 원장은 종종 수강생을 만나 퀴즈를 내어 공부를 잘 마쳤는지 확인했다.
대면과 비대면이 섞인 독특한 수업 방식은 효과를 봤을까? 6개월을 채우지 않고 그만둔 걸 보면 적어도 내겐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매일같이 공부해서 대학 가야 한다는 부담감과 더 놀고 싶다는 욕구가 충돌하던 고2였던 나는 ‘이제 곧 고3인데’라는 생각을 다잡으며 겨우 학원 의자에 앉았지만, 강의가 중반에 이르기도 전부터 지루해했다. 그럴 때면 옆자리 학생을 곁눈질하거나 남은 재생시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영상 속 원장의 다채로운 셔츠를 보며 ‘모두 다른 날 촬영한 걸까, 셔츠를 여러장 준비해놓고 하루 만에 촬영한 걸까’ 따위를 궁금해하기도 했다.
최근 교육부가 인공지능(AI)을 탑재한 디지털교과서로 ‘모두를 위한 맞춤형 교육’을 하겠다고 밝혔다. 202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디지털교과서는 무엇이고, 그것을 활용한 수업은 또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던 차에 지난 11일 비슷한 방식의 수업을 시도 중인 경남의 한 초등학교에 다녀왔다. 태블릿피시(PC)에 교육과정과 관련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장착된 형태의 디지털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수업 자료와 문제풀이, 보충 설명 등을 제공했다. 교사가 수업 주제인 ‘태양계의 행성’과 관련한 개념을 설명하자, 학생들은 각자의 기기를 활용해 자료를 조사하고 학습 정도를 확인하기 위한 문제를 풀었다. 기기는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 각자 다른 문제를 냈고 개별 학습역량을 고려한 교육 영상도 추천해줬다.
학생들이 개별 기기를 이용해 자율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맞춤형 교육이 이뤄지는 장면은 흥미로웠지만, 나는 학창 시절 다닌 그 영어학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단순히 강의를 녹화한 영상을 제공하는 것과 학생 수준을 파악하고 학습 정보를 교사에게 전달해주는 인공지능을 동일선상에 놓고 볼 일은 아니다. 수강생을 불러놓고 강의 영상을 보게 한 원장의 알 수 없는 의중과 학생 한명 한명에게 맞춤형 교육을 하겠다는 공교육의 시도도 나란히 비교하긴 어렵다. 하지만 기기를 활용해 배우는 이와 가르치는 이의 접촉면이 줄어드는 점과 그로 인해 학생의 자율성이 수업의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은 닮은 듯하다. 학습 의지가 덜한 학생들은 인공지능이 선사하는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활용하기보단 태블릿피시로 다른 활동을 하고, 결과적으로 방치되기도 쉬울 테니 말이다. 10여년 전 공부가 싫었던 고2가 영혼 없이 강의 영상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학습역량이 제각각인 학생들에게 동일한 수업 내용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그간의 수업 방식에 개선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다만 인공지능을 활용한 ‘미래형 수업’이 보편화하면 그 속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생긴다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현장 교사들이 “디지털교과서가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더라도 결국 공부를 할 수 있게 학생들을 잡아주고 동기를 부여하는 건 교사와의 접촉”이라며 우려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맞춤형 교육이라는 난제를 풀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의욕을 불어넣어주는 교사의 밀착 지원과 그를 가능케 할 교육 여건을 갖추는 것 아닐까.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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