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물건이 아닙니다 [서상혁 수의사의 동물과 사회]
편집자주
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수의사이자 동물병원 그룹을 이끄는 경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물과 사람의 더 나은 공존을 위해 지금 필요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1981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로얼드 호프만이 1996년 출간한 'THE SAME AND NOT THE SAME(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은 제목이 내용보다 더 유명한 책 중 하나일 겁니다. 실생활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화학의 세계가 얼마나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지를 설명하려 했던 저자의 의도와 달리, 저는 책장에 꽂힌 이 책을 볼 때마다 화학은 역시 난해한 것이구나 느끼게 됩니다. 화학의 문외한으로서 변명하자면, 저는 이런 감정의 8할은 제목 탓이라고 생각해요. 같으면 같고 다르면 다른 것이지,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한 것은 당최 무엇이란 말인가요.
우리 뇌는 대상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존재할 때, 대상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토마토가 과일이기도 하고 채소이기도 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채소로 정의돼야만 토마토를 마트 어디에 진열해야 하는지 혼란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아마도 절대불변의 과학 법칙을 제외한 영역에서 정의(definition)하기가 가장 중요한 학문은 법학일 겁니다. 실제로 법학엔 법률이 명확한 용어 등으로 분명하게 규정돼야 한다는 명확성 원칙(void for vagueness doctrine)이 따로 존재할 정도이죠. 각 나라의 법률에서 대상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보면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간단한 질문입니다. 대한민국 법률에서 동물은 어떻게 정의돼 있을까요? 답은 물건입니다. 대한민국 민법 제98조는 '유체물 및 전기, 기타 관리할 수 있는 자연력'을 물건으로 정의하는데, 동물은 유체물에 포함돼 물건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물론 대중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전국 성인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2022 동물복지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4.3%가 동물과 물건의 법적 지위를 구분하는 데 찬성한다고 밝혔으니까요. 요컨대 우리나라의 동물은 법률적으로는 물건이고, 인식적으로는 생명인 '물건이기도 하고, 아니 물건이기도 한' 지위를 지닌 것입니다.
다행히 법률 전문가들도 똑같은 혼란을 느꼈는지 2021년 7월 법무부는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조항을 신설한 민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국무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그해 10월 국회로 넘어갔지만, 아직 본 안건은 법사위 회의에서 단 한 번도 다뤄지지 못했습니다. 애초 국회는 4월 안에 민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5월이 된 지금도 동물은 물건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물의 지위를 정의하는 문제보다 중요한 민생법안이 산적한 까닭으로 이해해 보지만, 그 덕에 오늘도 이 나라에선 동물학대 등의 처벌에 관하여 이해하기 힘든 관용이 허락되고 있습니다.
현행 동물보호법상 동물을 학대로 죽인 자는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심각한 상해를 입힌 자는 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신체가 아닌 '겨우' 재산에 대한 절도에 대해 6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합니다. 형량만 보면 동물의 생명은 사람의 물건 중에서도 하급 취급을 받는 셈입니다. 실제로 2021년 법원은 길고양이, 토끼 등 동물에게 화살을 쏘고 목을 자르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일삼은 피고인에게, 초범이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징역 4개월과 벌금 100만 원의 집행유예를 선고한 바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동물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가 민법의 문제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동물의 지위가 물건에서 생명으로 바뀐다고 하루아침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지금 동물의 정의에 더 집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사회에 동물을 어떻게 정의할지에 관한 혼란이 존재하는 한, 동물 문제의 해결은 구시대의 틀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라는 당연한 원칙에 따라 동물을 해하는 자는 납득할 만한 처벌을 받고, 어릴 때부터 동물의 존재와 공존에 관한 의무적인 교육이 이뤄지는 사회. 그제야 동물은 진정한 생명의 지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서상혁 아이엠디티 대표이사·VIP동물의료센터 원장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대기업 회장, 160㎞ 페라리 도심 질주... 적발되자 부하 "내가 운전" 거짓말
- “나 지금 소름”… 여성 혼자 사는 집 문 틈 들어온 철사 올가미
- '폭행 논란' 황영웅 복귀설 일파만파… "팬분들 위해"
- 북한 우표는 알고 있다, 김정은이 다음에 무엇을 할지
- [단독] 아들은 '변호사'인 척, 엄마는 '사랑하는' 척... 일가족 재산 가로챈 '모자 사기단'
- 장병에 '뚫리는 방탄복' 입히다니… 업체 꼼수 알고도 품질 통과
- "한국 사회는 왜 전두환을 단죄하지 못했나"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르포] '쿵쿵' 울리던 집, 윗집에 매트 깔았더니... 층간소음 실험실
- [단독] "임금? 벌금 낼게"... 체불 전력 12번 악덕업주, 건설일용직 임금 3년간 안 줘
- '계엄군 시점'으로 5·18 사진 올린 보훈처… 뒤늦게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