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푸른 하늘 은하수~"… 희망찬 아이들의 노래로 듣는 100년
1920~40년대 일제강점기 광복 염원 담은 노래 많아
1948년 KBS '종달새동요회' 결성… 보급 운동 본격화
만화주제가 즐겨 위기… 꿈·희망 주는 노래 만들어야
월간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한국동요 100년사
어린이가 차별 없이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은 어린이를 위한 노래, 동요를 보급했습니다. 5월,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들의 마음을 한 뼘 자라게 할 동요를와 어린이를 위한 공연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어린이의 마음동심으로 돌아가 어린이 음악 세계에 귀를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요?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가사의 '어린이날 노래'(윤극영 작곡)는 1948년에 작곡되었지만, '어린이날'이 처음 제정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던 1922년 5월 1일이다. '딸년' '아들놈' 등으로 불리며, 성인을 기준으로 아직 미숙하던 존재로 인식되던 아이들에게 '어린이'라는 새 이름과 세대명을 지어준 이는 방정환(1899~1931)이었다. 방정환은 1923년 우리나라 최초로 어린이를 위해발간한 월간 '어린이'의 창간사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도 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고대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비둘기와 같이 토끼와 같이 부드러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뛰노는 모양 고대로가 자연의 자태이고 고대로가 하늘의 그림자입니다. 거기에는 어른들과 같은 욕심도 아니하고 욕심스런 계획도 있지 아니합니다. 죄 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 이 모든 깨끗한 것을 거두어 모아내는 것이 이 '어린이'입니다."를 발간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성인이 되지 못한 미완의 존재가 아닌, 문화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그 세대만의 독특한 감성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인격체로 여겼으며 , 어린이야말로 장차 세상을 이끌어갈 꿈나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20~1930년대 창작동요의 토대 형성과 전성기
월간 '어린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로 알려진 '반달'(윤극영 작곡)은 물론 '고향의 봄'(홍난파 작곡)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실려 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하는 '반달'은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불러봤을 만큼 익숙한 노래다. 그로부터 한 세 기가 지난 지금, 아이가 부를 것을 염두에 두고 어른이 노랫말과 곡을 짓기 시작한 지도 100년이 다 되어간다. 즉, 한국 둔 창작동요를 짓기 시작한 것도 100년이 다 되어간다.
우리가 창작동요를 부르게 된 것은 서양음악 도입 이후부터지만, 이전에는 전래동요가 있어 민요와 함께 오랜 세월 불려왔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강강술래' '동무동무 씨동무' 등이 전래동요에 해당하는 곡들이다. 민요나 전래동요의 가락은 매우 쉽고 단순해 어른들도 아이들도 쉽게 익히고 부를 수 있어 었고, 작사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채 구전되어왔다. 따라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고 일부는 변형되어 전해지기도 했다. 창작동요는 그 대척점에 있는 노래로, 1920년대에 활발하게 시작됐다. 너도나도 부르는 노래로 자리매김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30년대에 많은 작곡가와 아동문학인들이 동요의 전성기를 만들어나간다. 일례로 이흥렬(1909~1980)은 일본 동양음악학교(현 동경음대의 전신)를 졸업하고, 1931년에 귀국하여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동요 작곡을 시작했다. 1933년경 경성보육학교에서 홍난파와 함께 일하기도 했으며, 1934년에 '이흥렬 작곡집', 1937년에 동요집 '꽃동산'을 출간했다.
이러한때에 동요는 질적·양적으로 풍성해졌고, 동요를 통해 민족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자생력을 키우자는 운동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에 앞으로 미래를 짊어질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어른들이 갈망하고, 현재로서는 찾지 못하는 '희망'과 '빛'이 실렸다. 무엇보다 동요는 아이들의 심성에 침투하는 세파로부터의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천진난만하게 부르던 노래에는 이러한 시대상과 어른들의 희망이 담겨 있다.
◇1940년대 노래를 통해 성장하고 배우는 새 주역들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 이 시기는 일제의 혹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우리말로 된 동요를 만들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부를 수도 없던 불행한 시절이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아이들은 전장에서 불리는 9가를 따라 부르거나, 일제에 충성하는 곡조의 노래를 을 뜻도 모른 채 불러야만 했다. 하지만 뜻을 품은 어른들이 일제의 눈을 피하며 우리 동요를 전파했다. 어린이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 동요를 통해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려는 뜨거운 열망이었다. 그토록 힘든 시기를 지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다.
'새 나라의 어린이'(윤석중 작사·박태준 작곡)는 이러한 광복의 기쁨과 어린이의 다짐을 나타낸 곡으로, 광복 후 최초로 창작된 동요이다. 해방이 되었으니 새 나라의 주역인 어린이들은 더욱 많이 배우고 갈고 닦아야 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동요가 상상이나 동화 속의 이야기를 노래했다면, '새 나라의 어린이' '학교종' '졸업식 노래' '어머님 은혜' '어린이날 노래' '어린이 행진곡' 등1940년대의 동요는 현실 속에서 더 '똑똑한 어린이'가 되기를 노래하는 노래들이 많다. 이 그렇다. 1920~30년대의 노래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상징하는 노스탤지어 풍의 동요들이 많았다면, 1940년대는 보다 활기차고 밝은 노래들이 많았은 것도 이 시기의 한 특징이다.
◇1950~1960년대 전쟁의 상처 달래고, 방송으로 동요의 전성기를 열다
1950년대는 6·25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마음을 순화하는 동요가 다수 발표되었다. 특히 인기가 많았던 것은 '섬집 아기'였다. 1946년에 한인현이 지은 동시에 이흥렬이 1950년에 곡을 붙인 곡이었다. 자장가로도 불렸던 이 노래는 훗날 가수 박인희, 이선희가 자신들의 음반에도 수록할 정도로 동요를 넘어 한국인의 애창곡이 되었다.
1950년대에 동요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방송공사(KBS)가 기획하고 보급한 이른바 방송 동요다. 1948년 종달새동요회를 결성하여 이끌던 한용희(1931~2014)가 1954년 KBS 서울중앙방송국 PD로 입사하면서 '새 시대의 새로운 동요'라는 이름 아래 방송을 통한 동요 보급 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됐다. 그는 1950년대 말부터 동요 창작에 몰두하여 주옥같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때시기에 만든 작품이 '파란 마음 하얀 마음' '고향 땅' '푸른 잔디' 등이다. 그가입사하던 당시 서울중앙방송국은 서울 정동에 있었다. 방송국에는 공개방송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용희는 어린이들이 직접 관람하는 공개방송을 시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30여 명이 방청한다는 조건하에 인가를 얻었다. 녹화방송이 아니라 생방송을 하던 시절인데 어린이들이 출연하는 노래자랑 '누가누가 잘하나'와 퀴즈 프로그램 '무엇일까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공개방송이 있는 날이면 정동 일대는 방청을 원하는 어린이들로 거리가 꽉 메워지기도 했다.
이러한 방송 동요를 통해 수많은 문학인과 작곡가들이 한마음으로 동요 보급에 힘썼으며, 동요는 또 다른 전성기를 맞는다. '나뭇잎 배' '파란마음 하얀마음' '초록바다' 등이 이러한 1950년대를 대표하던 노래들이다. 이러한 동요의 전성기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동요 합창의 수준도 세계적이라 할 만큼 향상되었다. 우리나라 어린이합창단의 첫 해외 순회 연주는 1954년 안병원이 지휘하는 한국어린이합창단이 미국을 순회 연주한 것이다. 1962년부터는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이 거의 연례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 했다.
◇1970~1980년대 산업화, 대중음악와 문화에 밀린 동심
1960년대, 1970년대에 산업화가 시작되었고, 많은 문화가 자극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TV·라디오 등이 신식매체는 아니었지만, 일반 가정에 보급되며 국민정서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가요, 팝, CM송 등의 대중음악들이었다. 상업적인 음악은 어린이들의 정서에도 깊게 침투하기 시작했다. 청바지와 포크음악 열풍이 불었던 1970년대에도 동요의 존재를 부각시켰던 노래는 '과수원길'(김공선 작곡·박화목 작시)이다. 1972년 한국동요동인회를 통하여 발표된 곡으로 국민 애창곡이 된 '과수원길'은 느린 8분의 6박자의 서정동요로, 아름다운 노랫말에 정감 있는 가락을 지녔다. 동요로 태어난 곡은 합창곡으로도 편곡되었고, 당시 인기를 끌던 서수남·하청일 콤비가 불러 큰 호응을 얻었으며 어린이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널리 애창되는 동요로 자리 잡았다. 1975년 5월에는 국가가 긴급조치 9호를 발행했고, 대중가요에 금지곡의 딱지가 붙기도 했다. 그리고 음반마다 이른바 '건전가요'를 한 곡씩 의무적으로 넣어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클래식 음악이 교양음악이 되었고, 동요가 건전 노래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동요의 예술성을 드높이는 일련의 음악적 활동이 활발했다. 동요의 합창 교육은 물론, 동요 합창의 교향악단 협연도 여러 차례 시도되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동요는 이러한 시대와 조우하며 1970년대에는 어린이들의 노래 경연 프로그램인 KBS의 '누가누가 잘하나'가, 1980년대에는 방송창작동요대회가 나름대로 동요를 지키는 역할을 해주었다. 점차 증가하던 경연대회는 참가자들에게 동요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육·보급하는 역할을 했고, 이를 통해 어린이들은 기존 동요와 대회 참가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열심히 부르곤 했다.
◇1990년대 희미해진 명맥
동요 음반에 수록된 노래 중 그 끝을 차지하는 노래들은 시기적으로 1990년대에 만들어진 곡들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 시청률과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제일 먼저 폐지된 것은 어린이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새 주역이라고 치켜세우던 어른들은 그 공백을 자신들을 위한 흥미 위주의 프로그램들로 채웠다. 시대적으로는 풍족해졌지만, 어린이들은 동요 한 자락 배울 수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동요보다 더 먼저 영어를 배워야 하는 국제화 시대였고, 동요보다 입시를 통과하며 경쟁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생존을 위한 공부가 더욱 중요해진 것이었다. 1990년대가 되면서 문화적으로는 더욱 풍요로워졌지만, 그 이후부터 현재 지상파 방송에서 유지하고 있는 KBS의 '누가누가 잘하나'가 유일한 어린이 동요프로그램으로 방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동요제도 많이 줄어 몇 개 되지 않는다. 동요대회에 관심이 있거나 노래를 잘하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동요제를 잘 알지 못하고, 동요를 부르지도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2000년대 인터넷 속의 동요와 약해진 명맥의 동요제
1997년부터 대중성 있는 동요가 잘 나오지 않았고, 이로 인해 창작동요제의 명성도 퇴색되었다. 김대중 정부였던 1998년, 정보통신망 고도화 추진계획에 의해 인터넷 보급과 함께 인터넷 플래시 형태 동요의 유행으로 인해 창작동요제 출신의 동요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1997년 외환위기의 여파로 경기가 어려워지자 동요 관련 프로그램 제작비 지원도 줄었고, 오랫동안 제작비의 일부를 협찬하던 국내 아동복 시장도 사양길을 걸으면서 기업체의 협찬도 줄어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1983년부터 진행되었던 MBC 창작동요제도 2010년에 막을 내렸다. MBC 창작동요제 폐지 후 2012~2015년에 울산MBC에서 개최하는 서덕출 창작동요제를 전국에 방영하였다. 이 동요제는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2005년도에는 한국동요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일이 생겼다. 일본의 초등학교 6학년 음악교과서(도쿄소세키 판)에 한국의 창작동요 '파란마음 하얀마음'이 수록(제목 '靑い心 白い心')된 것이다. 가사는 일본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로도 부르게 되어 있는데, 이를 계기로 한국의 우수한 동요를 외국에 널리 알리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의 창작동요는 비록 외래문화의 형식을 빌려 왔지만, 그 심층에는 우리 민족의 원형적 음악 감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노래들이 우리에게 왜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지금 동요에 담긴 의미와 의의 찾기
일제강점기·해방기·전쟁기의 역사에서 동요의 생명력과 역할을 살펴보았듯이 동요는 당대와 함께 호흡하며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맑고 순수한 감성을 갖게 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해왔다. 그러나 한 세기 동안 민족의 숨결을 고이 간직해온 동요는 척박한 역사와 환경의 과거보다 더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유아기의 아이들도 동요보다는 유행하는 만화 주제가를 선호한다. 어린이가 어린이다운 순수함을 잃고, 자극적인 상업음악에 길드는 현상이 만연한 것이다.
기계 문명에 익숙한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기계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샘물처럼 맑고 순수한 동요가 더욱 절실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아름다운 그들만의 마음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사는 지혜로운 어른의 몫일 것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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