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면 죽는다” 초고가 초저가 양극단으로 몰리는 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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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는 올해 초 핸드백 ‘버킨 25 토고’의 가격을 7400유로에서 8050유로(약 1170만원)로 9% 올렸다. 예년에 2% 안팎 인상했던 것과 비교해 지나칠 정도로 가격을 끌어올렸다. 하루아침에 100만원가량 값이 뛰었는데도 불구하고 ‘버킨 25 토고’는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올해 1분기 에르메스의 매출은 작년 1분기보다 23% 증가한 33억8000만유로(약 4조9000억원)였다. 팬데믹 이후 ‘보복 소비’ 열풍과 중국의 명품 시장 반등 영향이 컸다.
초고가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동안 초저가 상품도 잘 팔렸다. 미국의 대표적인 저가 할인 판매점 달러트리는 지난해 4분기 매출이 1년 전보다 9% 늘었다. 상품 하나당 최저 가격이 1.25달러인 달러트리는 값싼 물건을 찾는 수요를 등에 업고 지난해에만 매장 464곳을 새로 열었다.
소비 트렌드가 초고가와 초저가로 쏠리면서 ‘평균 실종(Redistribution of the Average)’ 현상이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평균 실종이란 김난도 서울대 교수가 올해 트렌드로 꼽은 단어다. 비싸지도 않고 싸지도 않은 상품을 소비자들이 외면하는 현상을 말한다. ‘애매한 중간 가격’을 내세우는 기업들은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
가격 수준이 백화점 명암 가른다
일본 오사카 중심 상권에서 길 하나를 두고 나란히 있는 한큐백화점과 한신백화점을 산케이신문이 최근 비교했다. 한큐백화점 매출은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돌아왔지만, 한신백화점은 아직 80%밖에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산케이는 그 이유를 “중간 가격대의 상품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먹을거리가 풍성한 한신백화점은 푸드코트가 있는 1층과 레스토랑이 있는 9층의 매출은 잘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중·장년층에게 주로 팔리는 생활 잡화나 신사복 같은 중간 가격대 제품이 포진한 중층 매장의 판매가 부진하다. 반면 한큐백화점은 보석·시계 등 명품 브랜드 상품을 앞세워 일본인 부자들은 물론이고 해외여행객들까지 끌어오면서 매출을 회복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올해 1분기 의류 할인 전문 백화점인 벌링턴의 매출은 지난해 1분기보다 13.2% 증가할 것으로 시장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반면 중산층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백화점 메이시스의 1분기 매출은 지난해보다 4.2%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싼 물건을 파는 벌링턴은 인기를 끌고 중간 가격대가 많이 포진한 메이시스는 소비자들의 발길이 뜸해진 것이다. 중간 가격대 상품을 판매하는 수퍼마켓인 앨버트슨과 크로거도 1분기 각각 2.5%, 1.3%의 부진한 매출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에서는 알리바바에 이은 2위 전자상거래 기업 징둥닷컴이 소비 양극화로 성장세가 꺾인 대표 사례다. 징둥닷컴은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7% 증가했는데, 2021년 4분기 매출 증가율이 23%였던 것과 비교하면 성장세가 확 꺾였다. 이 업체는 광범위한 물품을 취급한 탓에 가격상 비싸거나 싸다는 인식이 뚜렷하지 않다. 쉬레이 징둥닷컴 최고경영자(CEO)는 실적 발표에서 매출 증가율이 낮아진 이유에 대해 “소비 패턴의 양극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 속에 소득·소비 양극화 심각
소비 성향이 양극단으로 몰리는 것은 소득의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말 이후 전 세계에 인플레이션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고소득층의 소득 수준은 부쩍 높아지고 저소득층의 소득 증가 속도는 뒤떨어지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2020년과 2021년 사이 5분위(소득 상위 20%)가 버는 액수가 미국 내 가계 실질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2.2%에서 52.7%로 늘어난 반면, 나머지 중·저소득층인 1·2·3·4분위의 소득은 모두 총소득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낮아졌다.
골드만삭스는 2021년 2조5000억달러에 달했던 미국의 가계 저축이 최근 1조5000억달러 수준으로 감소한 가운데 대부분의 가계 저축을 고소득층이 보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소득층이 저축이라는 ‘여분의 실탄’을 보유하고 있어 소비 여력을 유지하는 반면에 저소득층은 저축해 둔 돈을 까먹어 살림이 빡빡해졌다는 의미다. 조셉 브릭스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는 “중·저소득층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초저가 제품을 선택하고, 고소득층은 인플레이션에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씀씀이를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애매한 가격의 브랜드 매각하기도
기업들은 뚜렷한 소비 양극화를 염두에 두고 값비싼 상품을 늘리는 프리미엄화를 꾀하는 마케팅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 프랑스계 화장품 기업 로레알은 식물성 원료로 만든 고가의 크림·로션으로 유명한 호주의 ‘이솝’을 25억달러(약 3조3000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이솝을 끌어안은 후 로레알은 조르지오 아르마니, 랑콤 같은 기존 고가 브랜드와 함께 럭셔리 뷰티 시장 공략을 가속화할 계획이다.
항공사들이 일등석·비즈니스석 등 티켓값이 비싼 프리미엄 좌석을 늘리겠다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따르면, 올해 2월 항공 여객 수는 팬데믹 이전인 2019년 2월의 81% 수준이었지만, 프리미엄 좌석 이용객 수는 86%까지 회복됐다. 독일의 루프트한자는 25억유로(약 3조6000억원)를 들여 프리미엄석을 늘리는 방향으로 좌석을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델타항공도 올 여름까지 모든 항공기에 프리미엄 좌석을 장착하겠다고 했다.
애매한 가격의 브랜드를 정리하는 기업도 있다. 최근 월마트는 남성복 브랜드 보노보스를 7500만달러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2017년 3억1000만달러에 사들인 이 브랜드를 헐값에 매각하는 것이다. 소비 성향이 어중간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브랜드를 정리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제조·유통업체만 소비 양극화를 감안한 가격 전략을 펴는 게 아니다. 넷플릭스와 디즈니 등 OTT 회사들은 영상 시청 중간에 광고를 보는 대신 구독료가 저렴한 요금제를 내놓고 있다. 주머니 사정이 나쁜 고객들을 공략하기 위한 것이다. 넷플릭스는 올해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7%, 신규 가입자 수는 4.9% 늘어나며 새 요금제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산층 소비자들이 중저가 제품으로 눈을 돌리고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며 “검소함도 사치도 아닌, 중간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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