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길 돌아 다시 ‘몽마르트르’ 옆에 선 정미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
“무지개가 뜨는 언덕을 찾아/ 넓은 세상 멀리 헤매 다녔네/ 그 무지개 어디로 사라지고/ 높던 해는 기울어가네/…/ 나 그리운 그곳에 간다네/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
가수 겸 화가 정미조(74)는 자신의 노래 ‘귀로’가 꼭 자기 삶 같다고 했다.
“무지개와 같은 나의 예술을 찾아 다니다 어느덧 인생의 해는 기울고,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 왔어요. 무슨 각본에 짜여진 것처럼요.” 1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만난 정미조가 말했다. 이날은 박물관에서 ‘이화, 1970, 정미조’ 특별전(10월31일까지)을 개막하는 날. 정미조는 1972년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지 51년 만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과 함께 모교로 돌아왔다. 그는 “화가의 꿈을 키운 이 교정에서 내 미술 인생을 정리하는 전시를 하게 돼 감회가 깊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가수의 길도 그랬다. 그가 대학교 2학년이던 1969년 교내 ‘메이데이’ 축제에서 노래하는 걸 본 가수 패티김이 말했다. “너 노래 참 잘하는구나.” 요즘 같으면 곧바로 가수로 데뷔했겠지만, 당시 재학 중 결혼과 연예계 활동을 금지한 학칙 탓에 1972년 졸업 뒤 데뷔하게 됐다.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등으로 인기 절정을 누리던 그는 1979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프랑스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 “그때 나는 원래대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쉽게 얻은 인기와 명성이다 보니 쉽게 버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파리에서 지낸 오래된 아파트 8층에는 발코니가 있었다. 파리 중심가가 보이는 야경이 아름다웠다. 야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린 <몽마르트르>(1981)는 모나코 몬테카를로 국제그랑프리 현대예술전 수상작이 됐다. 하지만 오랜 타향살이는 그를 외롭고 힘들게 했다. 야경을 보다 눈물을 흘릴 때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럴 때 샹송 ‘고엽’을 부르면 마음이 편히 가라앉곤 했다. 이날 특별전 개막을 기념해 박물관 강당에서 연 미니 콘서트에서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고엽’을 불렀다.
1993년 귀국한 그는 수원대 서양화과 교수를 지내며 작품 활동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2014년 정년퇴임 즈음 가수 최백호와의 만남이 그의 삶을 또 한번 바꿨다. 최백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갔다가 노래를 불렀더니 최백호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목소리에서 젊은 시절보다 더 짙은 향취가 나는데, 왜 노래를 안 하세요?” 최백호는 이주엽 제이엔에이치(JNH)뮤직 대표를 소개해줬다. 37년 만의 복귀작 <37년>(2016)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신곡 ‘귀로’를 비롯해 리메이크한 ‘개여울’ 등이 사랑받았다. 이후에도 <젊은 날의 영혼>(2017),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2020) 등 앨범을 꾸준히 발표하며 공연도 여러차례 펼쳤다. “가수로 돌아온 것도 각본처럼 짜여진 운명이었나 봐요.”
그는 몇년 전부터 눈이 불편해졌다고 했다. 밝은 빛 보는 게 힘들어 선글라스를 껴야 한다. 애초 80살에 하려던 회고전 계획을 앞당긴 이유다. 마침 모교 박물관과 연이 닿았다. 특별전을 마련해 파리 풍경, 서울 야경, 자화상 등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대표작 <몽마르트르> 등 30점은 아예 기증했다. 1970년대 발표한 앨범 초판 표지, 가수 활동 당시 입었던 앙드레김 드레스 7벌도 함께 전시한다. “그때 저는 앙드레김 선생님 옷만 입었어요. 선생님 작품이 박물관에 전시된 걸 하늘에서 보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미술 작품 활동은 이번 특별전으로 일단락되지만, 음악 활동은 계속된다. 당장 새달 중순께 새 음원을 발표한다. 아이유 주연 드라마 <나의 아저씨>(tvN) 주제가인 손디아의 ‘어른’을 재해석해 불렀다. “내가 부르면 좋을 것 같다고 누가 추천해서 들어보니 가사가 꼭 내 얘기 같았어요.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하는 첫 소절부터 ‘눈을 감아 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하는 후렴구까지 내 마음을 확 사로잡았어요. 파리에서 힘들었던 시절도 떠올랐고요.”
노래 제목처럼 그는 이제 진정한 ‘어른’이 됐지만, 그렇다고 이쯤에서 멈출 생각은 없다. 주위에선 그에게 “어떻게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더 좋아지냐”고 되묻는단다. “70년대 한참 활동할 때도 요즘처럼 많이 노래한 적이 없었어요. 저는 연습 벌레라 새로운 곡을 받으면 계속 불러요. 단독공연도 열몇번 했는데, 두시간 가까이 혼자 너끈히 공연하거든요.” 그는 이날 특별전 개막 기념 미니 콘서트에서도 ‘귀로’, ‘개여울’ 등 10곡을 가뿐히 소화했다. 최백호도 게스트로 나와 ‘낭만에 대하여’ 등 2곡을 부르며 축하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 요즘은 바깥에 잘 다니지 않고 집에서 책 보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명상하며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어요. 젊을 때보다도 에너지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이 에너지를 음악과 노래로 분출하려 합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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