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의운명] 원희룡 장관이 불 붙인 전세폐지론 “‘운용의 묘’ 살려야”

조은임 기자 2023. 5. 18.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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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 “전세제도 수명 다해”… 전세사기에 회의감 깊어져
’전세폐지’엔 반대의견 압도… 정책·운용 중요해
’에스크로’엔 찬반 엇갈려 “전세제도 근간 흔든다” 의견도

우리나라 주택정책을 총괄하는 국토교통부의 원희룡 장관이 “전세제도는 수명을 다했다”고 언급하자 ‘전세폐지론’에 불이 붙었다. 빌라왕, 건축왕 등이 벌인 ‘전세사기’ 사건이 전국 곳곳에서 발생하면서 전세제도에 대한 회의감이 깊어진 와중이었다.

전세제도의 폐지를 논하기는 무리라는 게 중론이다. 50년이 넘도록 서민주거 안정에 기여해 온 전세제도를 폐지한다면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전세사기 역시 시장불황과 운용·정책의 실패를 원인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우리나라엔 여전히 ‘내 집’이 부족하고, 서민들의 전세수요는 살아 있다는 것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16일 세종시에서 국토부 출입기자단과 월례 간담회를 하고 있다./뉴스1

◇전세사기 원인 ‘복합적’… 시장침체·역전세·정책실패 맞물려

전세사기는 사실 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전세가율이 높은 일부 지역에서 갭(gap)투자가 무분별하게 일어난 데 근본 원인이 있다. 부동산업계에서는 통상 전세가율 80% 이상인 주택을 ‘깡통전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1~3월 전국 시·군·구 중 아파트 전세가율이 80%를 넘는 지역은 33곳에 달한다. 매수를 한 저변에 사기의 의도가 있었다면 전세사기일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일종의 보증금 사고일 터다.

전세제도를 운용하는 데도 미비점이 적지 않았다. 전세사기 사건은 주로 다세대, 연립 등 빌라에서 일어났는데, 일반인들이 빌라의 적정가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가구 수가 많고 거래가 빈번한 아파트와는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가장 근본적인 해법으로는 연립·다세대주택의 실거래가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출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 악성임대인에 대한 정보제공은 물론, 임대인 변경시 세입자가 쉽게 알 수 있도록 보완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빌라의 경우 정보의 접근성을 높여줄 필요가 있다”면서 “같은 평형, 같은 층의 시세가 공개되는 아파트와는 다른 점이 많다”고 했다.

원희룡 장관이 언급한 것처럼 임대차3법과 같은 정책 실패도 전세사기의 빌미를 제공했다. 전셋값을 폭등시키고 시장의 가격왜곡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최근 부동산 상승기에 빌라는 아파트의 ‘대체제’로 주목받았다.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빌라’로 눈을 돌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3월 서울의 전체 주택매매 건수 중 빌라 매매비중은 64.6%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여기에 과도한 대출규제도 집주인의 자금 마련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전세사고를 유발하게 한 측면이 있다.

최근 금리인상으로 인한 주택가격 급락은 전세에 낀 거품을 걷어내면서 전세사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가격 상승이 지속됐다면 집주인은 새 세입자에게 더 높은 전세금을 받아 보증금을 돌려주는 데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아파트 전세가격은 전년 대비 3.35% 떨어져, 2001년 이후 가장 큰 하락폭을 기록했다.

박합수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는 “주택가격이 하향 조정되면서 버블이 끼었던 다세대 주택 시장의 가격 하락이 나타났다”면서 “전국적으로 역전세, 깡통전세가 속출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서울 강서구의 한 빌라 밀집지역./뉴스1

◇전세, 서민 주거안정 기여… ‘에스크로 도입’엔 “글쎄”

주택정책 주무부처 장관이 이토록 강경하게 전세제도 개편을 언급한 건 사실상 처음있는 일이다. 국토부가 최근 ‘전세사기’ 해결에 사활을 걸고 있는 만큼 제도의 미비점을 손보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여론에서는 장관의 발언을 두고 ‘전세가 없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찬성보다는 반대가 앞서는 분위기다. 전세사기의 원인으로 제도 자체를 지목하고 폐지를 논하는 것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는 것이다.

전세제도가 존치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서민 주거 안정을 꼽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42개 국 중 주거비 부담이 가장 낮은 국가로 한국이 뽑힌 이유도 사실상 주거비가 ‘0원’인 전세제도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은 주거비는 가처분소득의 14.7%로, OECD 평균(20.5%)보다 훨씬 낮았다. 전세가 반세기 동안 임대차시장에서 자리를 잡아왔던 만큼 사실상 폐지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시장에서 작동하고 있고 수요가 있는 전세를 인위적으로 통제할 필요는 없어보인다”면서 “만약 월세만 존재한다면 월수입의 상당수가 주거비로 소요된다는 얘기”라고 했다.

일각에서 언급되는 에스크로(제3기관에 전세보증금 예치) 제도 도입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전세 거래시 금융회사에 전세보증금을 맡겨 안전 결제를 보장하자는 제도인데,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고를 방지하는 데는 효과적이나, 보증금을 이미 일종의 무이자 대출로 인식하고 있는 집주인 입장에서는 적잖은 반발이 예상된다. 이 경우 시장에서 자동적으로 반전세, 월세 비중이 높아져 결국 주거비 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전세보증금을 집주인이 아닌 금융기관에 예치를 한다는 것은 전세제도의 근본을 흔드는 것”이라면서 “현실적으로 나가는 임차인의 보증금을 들어오는 임차인이 주는 형식에서 유지되는 것이 전세라 도입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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