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예술감독이 꽂힌 체호프의 대사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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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벚꽃동산> 의 이 마지막 대사가 김광보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움직였다. 벚꽃동산>
하지만 체호프는 원래 이 작품에 '희극'이란 주석을 달았다.
"라네프스카야는 세상의 모든 가치가 사랑으로 해결된다고,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어요. 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오면 사랑으로 도망치는 사람이죠." 이렇듯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의 풍부함이야말로 체호프 작품의 생명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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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아. 아무것도 없군. 아무것도….’”
연극 <벚꽃동산>의 이 마지막 대사가 김광보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움직였다. 연출 경력 30년 만에 처음으로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작품을 손에 잡은 계기였다. 김 감독은 최근 간담회에서 “주변에서 ‘이제 체호프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해서 희곡을 읽다가 이 대사에 꽂혀 연출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가 속한 법무법인 대표를 연기한 배우 백지원(50)이 주인공 맡았다. 5년 만의 무대 복귀 작품이다. 김 감독은 “희곡을 읽으면서 딱 백지원 배우를 떠올렸다”며 목소리를 백지원 배우의 특장점으로 꼽았다. “이 배우는 호흡이 굉장히 아래에 있어요. 어떤 역할을 해도 신뢰를 줄 수 있는 목소리죠.” 김 감독과 백지원 배우가 9번째 호흡을 맞춘 연극이다.
체호프가 마지막에 쓴 <벚꽃동산>은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와 함께 ‘체호프 4대 희곡’으로 불린다. 농노해방(1861) 이후 귀족이 몰락하고 신흥 자본가가 부상하는 제정 러시아 말기가 배경이다. 곧 베어져 나갈 벚나무는 ‘좋았던 그 시절’을 상징하는 듯하다. 체호프의 다른 작품들처럼, 특별한 사건도 서사 전개도 없다. 격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낸다. 바뀐 현실을 끝내 인정하지 못하는 귀족 라네프스카야와 농노 출신 신흥 자본가 로파힌의 심리가 복잡하게 전개된다.
이번 연출의 차별성은 주인공을 허황하고 허영심에 찬 여성이 아니라 나름의 사리와 분별력을 지닌 인물로 그린다는 점이다. 캐릭터의 성격이 달라지면서 작품의 정서가 비극으로 흐른다. 하지만 체호프는 원래 이 작품에 ‘희극’이란 주석을 달았다. 김 감독은 “희극적 요소들이 역설적으로 비극으로 느껴지는 희비극 성격으로 그렸다”고 말했다.
백지원은 ‘사랑’이란 키워드에 주인공을 담아낸다. “라네프스카야는 세상의 모든 가치가 사랑으로 해결된다고,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어요. 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오면 사랑으로 도망치는 사람이죠.” 이렇듯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의 풍부함이야말로 체호프 작품의 생명력일 것이다.
신흥 자본가 로파힌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의사 겸 작가가 된 체호프를 떠올리게 한다. 로파힌을 연기한 배우 이승주는 “누구보다 과거에 얽매여 있고, 제대로 사랑받은 적이 없어서 사랑할 줄 모르는 인물로 해석했다”고 말했다.
연극이 끝날 때까지 벚나무 한 그루 나오지 않는다. 유리와 철제 구조물로 만든 저택 세트가 무대를 채운다. 그래도 끝은 ‘벚꽃엔딩’이다. 농노해방 이후에도 귀족 집안의 집사로 남지만 정신이 흐릿해진 늙은 하인 피르스가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 찬란했던 과거의 기억 속을 거니는 피르스는 텅 빈 저택에서 중얼거린다. “다 떠나버렸어. 나를 잊었군… 허허. 바보 같네.”
이 대목은 실제로 무대 세트가 닫혀 육성이 아닌 스피커를 사용했다. 그리고 무덤 같은 무대 위로 연분홍 벚꽃잎이 난분분 흩날린다. 희곡에 없는 장면이다. 김광보 연출은 이 장면을 ‘판타지’라고 표현했다.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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