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홍보맨, 은퇴 뒤 글을 통해 ‘지속 가능성’ 외치다
[서울&] [다시, 시작]
격동 시기 곡절 많은 대학생활 보낸 뒤
첫 직장 광산회사 거쳐 현대제철 근무
홍보 역할 맡으며 꾸준히 공부 이어가
한전 민영화 관련 글 ‘창비’에 실리기도
2018년에 ESG 열풍 보며 2년 뒤 퇴임
공부 모임 참여하며 여러 매체에 ‘칼럼’
원고 보내기 전 20번 읽는 노력 보여
“글 쓰는 사람 늘면 세상 더 아름다워져”
대기업 홍보맨에서 ‘환경·사회·거버넌스’(ESG) 전문 칼럼니스트로 변신한 김경식(62) 고철연구소 소장을 만나기 위해 4월 초 그의 연구소를 찾았다. 김 소장은 어떻게 ESG 전문 칼럼니스트로 변신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ESG는 기업의 지속 가능성, 윤리성과 사회적 영향을 측정하는 세 가지 핵심 요소인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가리킨다.)
어릴 적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공부 잘하는 막내 외삼촌을 닮으라 했다. 대학생이 된 삼촌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중학생이던 그는 대학생들이 왜 데모를 하는지 궁금했다.
1978년 그가 대학에 입학하고 2년 뒤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의 동아리 가톨릭학생회는 농민운동에 관심이 많아 선배들은 그에게 농촌으로 가길 권했다. 선배들 뜻에 따라 그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가 농민운동에 투신하는 건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82년 다른 대학의 경제학과로 입학하고 4월에 입대했다.
1986년 중학교 동창과 결혼했고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는 아내는 그의 학비를 대주었다. 2년 뒤 아기가 태어나고 다음해 그는 졸업반이 됐다. 그는 대학원에 들어가 경제사를 공부하고 싶었다. 교수는 ‘경제사를 공부하려면 집에서 10년은 뒷바라지해줘야 하는데 가능하냐?’고 물었다. 아이까지 있는 그는 공부를 선택할 수 없었다. 연령제한으로 대기업에 취업을 못한 그는 강원도 태백에 있는 광산회사에 입사했다. 왜 하필 광산일까?
“1980년 사북사태가 있었어요. 그땐 미래에 대한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어요.” 사북사태는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해 광부들이 일으킨 노동항쟁이다. 따라서 광산을 택한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3년의 경력을 쌓은 뒤 강원산업으로 옮겼다.
강원산업 입사 3년차에 기획조정실로 발탁됐다. 당시 정인욱(1912~1999) 강원산업 회장 밑에서 ‘인간 친화적인 경영철학’을 배웠다. 2000년에 강원산업과 인천제철이 합병되고 이후 사명이 현대제철로 변경된다.
이렇게 그는 ‘회사원’이었지만, 시민운동과 가깝게 지냈다. 계간 <창작과비평>의 독자로서 출판사 창비에서 여는 역사 문화 기행에도 참여했다.
2003년 9월, <창비>에 ‘한전 민영화의 문제점과 대안’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다. 그보다 몇 해 전인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이른바 ‘IMF 사태’가 터지고 정부는 IMF의 압력으로 공기업 민영화 계획을 세웠다. 특히 한전을 여러 기업으로 쪼개고 차기 정부에서 쪼갠 회사 중 수익성이 좋은 회사부터 매각할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산업용 전기료를 인상해야 했다. 현대제철도 산업용 전기료 인상에 영향을 받기에 그도 전기료 산정을 공부했다. 그는 기업 입장에서 한전 민영화에 대한 글을 썼고 <창비>도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잘 짚었다며 그의 글을 실어줬다. “당시 대통령실 인사 중에 <창비> 독자가 많았어요. 이 글로 한전 민영화를 재검토하는 계기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매각 계획이 철회됐다.
다음해 현대제철은 한보철강을 인수했다. 당시 현대제철을 이끈 정몽구 회장은 현대제철이 고급 강판을 생산할 능력을 갖추길 원했다. 고급 강판 생산은 오로지 포스코만이 할 수 있었다. 고급 강판을 생산하려면 당진제철소를 준공해야 했다. 10조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탓에 민간기업으로는 도전하기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다. 또한 선발업체의 심한 견제가 예상됐다. 현대제철은 그 일을 위해 그를 홍보팀장에 임명했다. 그는 홍보 일을 하며 철에 관해 공부했다. 고철 1㎏을 녹이면 철이 900g 나온다. 고철을 재활용하면 탄소 배출량도 줄일 수 있다. 그는 이런 고철의 친환경성을 홍보했다.
2010년 현대제철은 당진제철소 1호기를 준공했다. 이로써 현대제철은 한국에서 고급 강판을 생산하는 두 번째 기업이 된다. 그해 그는 임원으로 승진했다.
2018년 미국 대형 투자사 ‘블랙록’의 대표인 래리 핑크가 서신을 한 편 썼다. 지속 가능 한 경제를 위해서 ‘ESG 지표’를 기준 삼아 투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전세계 기업의 발등에 ESG라는 불이 떨어졌다.
2020년 김 소장은 퇴임했다. 다음해부터 ESG 공부 모임에 참여하며 여러 매체에 관련 칼럼을 썼다. 많은 곳에서 그에게 칼럼을 청탁하는 걸 보면 그만큼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필자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인 거 같다.
그에게 물었다.
“환경단체에선 투자사들이 ESG 지표 중 특히 기업의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면서 반가워할 거 같은데, ESG도 일종의 유행이 아닐까요?”
“유행일 수 있어요. 하지만 ESG가 아니더라도 결국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지표는 또 나올 거예요. 자본주의는 진화하니까요. 기업은 언제든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해요. 안 그러면 망해요.”
글쓰기를 위해 그는 어떤 노력을 했을까? “글을 잘 쓰는 친구들이 제 원고를 고쳐주면 나중에 제가 쓴 원본과 두 개를 비교해 봐요. 문장이나 표현, 구조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런 걸 보면서 글이 늘었죠. 아, 그리고 원고를 보내기 전에 20번은 꼭 읽어봐요.”
은퇴 뒤 칼럼니스트를 꿈꾸는 이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글 쓰는 거 너무 좋죠. 여행이든 시민운동이든 자기 분야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이 훨씬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기업이 국력이고 복지다! 좋은 기업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
이 문장은 그가 새로 쓴 책 <착한 자본의 탄생>(어바웃어북 펴냄)에서 밝힌 신념이다. 기업 내부에서 이해관계자들과 상생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던 김 소장은 은퇴 뒤에는 기업 밖에서 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 방안을 제시하는 쓴소리를 내고 있다. 자리만 바뀌었을 뿐 그는 여전히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의 연구실 벽면은 책으로 꽉 차 있었다. 책상 위에도 연구실 바닥도 각종 자료가 쌓여 있다. 그는 반박이 들어올 수 있어서 자료를 버리지 않고 모아둔다고 했다. 연구공동체 없이 홀로 공부하는 게 힘겹지 않은지 물었다. “재미있어요. 공부 모임도 하고 있고요. 이야기 나눌 친구도 있고.” 건강관리는 어찌하는지 물었다. “운동은 안 하고 공부만 한다고 아내에게 혼나요.” 은퇴 뒤 드디어 원하던 연구자가 된 김 소장이 활짝 웃는다. 오늘도 김경식 소장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깨알 같은 자료를 뒤적일 것이다.
강정민 작가 ho098@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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