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곡물협정 가까스로 연장···러시아, 경제 피해 용납 못하는 중국-튀르키예 눈치 보기
흑해 항로를 통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보장하는 ‘흑해 곡물 협정’이 중단 하루 전 가까스로 연장됐다. 우크라이나 침공 후 흑해를 봉쇄한 러시아는 서방의 금융 제재 해제를 요구하며 곡물 협정 파기를 무기로 내세웠지만, 결국 17일(현지시간) 2개월 연장에 합의했다.
러시아가 협정을 깨지 못한 데는 러시아를 두둔하고 있는 중국, 튀르키예 등의 영향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들 나라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식량 흐름이 끊겨 경제적 피해를 입을 경우 러시아에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러시아가 우호국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이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TV연설을 통해 흑해 곡물 협정 연장을 발표한 뒤 러시아, 우크라이나, 유엔이 연장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세계 식량 안보를 보장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라면서도 “협정 이행의 왜곡이 시정돼야 한다”며 금융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러시아는 서방의 금융 제재로 인해 식량·비료 수출시 지불·보험 문제가 발생해 선적 차질을 빚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협정 연장을 환영하면서도 ‘식량’을 무기 삼는 러시아를 비판하고 나섰다. 베단트 파텔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러시아가 사람들의 굶주림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쟁 이후 흑해 봉쇄로 고조된 세계 식량난 완화를 위해 지난해 7월 22일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흑해에서 곡물 수출선의 안전을 보장하는 내용의 흑해 곡물 협정을 맺었다. 협정은 120일 기한으로 지난해 11월에 이어 지난 3월 두 번째로 연장됐으나, 러시아는 두 번째 연장의 기간이 120일이 아닌 60일로 오는 18일 종료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협정을 쉽게 깨지 못하고 연장에 합의한 배경에는 중국과 튀르키예 등이 있다고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설명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에게 중국과 튀르키예는 몇 안 남은 우호국이다. 하지만 러시아로 인해 식량 물가가 치솟아 결국 자국 경제 피해로 이어질 경우 이들 나라들이 러시아 편에 계속 서 있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협정의 최대 수혜국은 중국이다. 협정 이후 우크라이나산 곡물을 가장 많이 수입했다. 총 수출 물량(약 3000만t) 중 700만t이 중국으로 향했다. 튀르키예는 우크라이나산 곡물을 세 번째로 가장 많이 수입한 나라다. 현재 튀르키예는 대선 결선 투표를 앞두고 있다. 대지진, 리라화 폭락 등으로 경제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식량 위기까지 겪게 된다면 에르도안 정권은 치명타를 입게 된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 입장이다.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 아직 채 회복하지 못한 중국 경제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게다가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은 저개발 국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케냐, 소말리아, 예멘 등의 구호 활동을 위한 선박도 흑해를 지난다.
러시아중앙은행 임원으로 일했던 알렉산드라 프로코펜코는 포린폴리시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시진핑 중국 주석과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지지는 절실하지만, 반대로 두 사람에게 푸틴 대통령과의 우호관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면서 “정치적으로 러시아는 불리한 입장에 있다”고 분석했다.
결국 러시아가 식량을 인질 삼아 세계를 협박하려 하지만, 언제 변할지 모르는 우호국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농업 경제학자인 크리스토퍼 배럿 미 코넬대 교수는 “중국과 튀르키예가 아직까지는 러시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지만, 자국 경제에 직접적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암묵적 지지를 유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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