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우표는 알고 있다, 김정은이 다음에 무엇을 할지[문지방]
'은둔의 왕국' 읽는 자료...정세 이해·예측 가능
주애 등장 두달 전 '핵=미래세대' 암시 우표 내
반미 우표는 5년 중단, 올 6~7월 발행 여부 주목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우표는 ㎠당 담긴 이데올로기의 밀도가 가장 높은 문화 형식."
기호학자 데이비드 스콧
북한은 외부와 차단돼 '은둔의 왕국'이라 불립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죠. 정보요원이 수집하는 휴민트(HUMINT·인적 정보)와 첨단장비로 신호를 포착하는 시긴트(SIGINT·신호 정보)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분석관을 지낸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을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공개 정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 관영매체 보도나 당국자의 담화, 논평, 그리고 최고위층의 공개 행보를 면밀히 살펴보면 북한 정세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중 우리 학계가 주목하는 건 북한 우표입니다. 가로·세로 길이가 2~3㎝에 불과한 작은 크기에 북한의 속내를 축약한 주요 정보가 담겨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북한에서는 우표를 '꼬마 외교관'이라고 부른다네요. 우표사업은 노동당의 핵심부서인 선전선동부에서 맡고 있습니다. 외부 세계에 체제를 선동하고, 주민 결속을 유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북한 내부에 손전화(휴대전화)가 700만 대쯤 보급됐다고는 하나, 김정은 정권은 지금도 매년 60~80종의 우표를 꾸준히 찍습니다. 그런데 우표를 통해 북한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읽느냐구요? 지금부터 설명해드릴게요.
미사일 쏴 올리는 교육 우표 발행, 주애 등장을 위한 '빌드업'
북한의 '우표 정치'는 철저한 계획하에 이뤄집니다. 기념일, 정치·군사 이벤트 등을 고려해 향후 1년간 발행할 목록을 미리 만들죠. 북한당국이 올해 무슨 일을 할지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우표 도안만 잘 뜯어봐도 미래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죠.
우표가 북한 최고위층의 속마음을 미리 보여줬던 사례를 하나 말씀드려 볼게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딸 주애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관련된 이야기인데요. 엄마, 아빠를 꽤 닮은 열 살배기는 지난해 11월 18일 '괴물'이라는 별칭이 붙은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7형 시험발사 현장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후 아버지를 따라 열병식 등 군사 현장에 잇달아 나타나 국제 사회의 이목을 끌었죠.
북한 우표 전문가들은 주애의 '선군 행보'가 일찌감치 예견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북한이 지난해 9월 25일 공개한 교육 우표의 도안에 '복선'이 깔려 있었다는 건데요. 30원짜리인 이 우표에는 '학생들을 훌륭한 혁명인재로 키워 조국의 미래를 담보하자!'라는 문구와 함께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과 교사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우측 하단에 뜬금없이 핵을 상징하는 마크가 들어가 있었죠. 또 다른 우표에는 학생 옆으로 발사되는 미사일 이미지가 담겼습니다. 정다현 남북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18일 "우표를 통해 핵과 미사일이 북한의 미래 세대를 보호해 줄 존재라는 프레임(사고의 틀)을 선전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 '백두혈통'이자 북한 미래세대의 상징인 주애가 등장했고 아버지를 따라 핵·미사일 발사 현장 등을 시찰하며 이런 프레임을 공고히 하게 되죠. 핵 마크가 찍힌 우표 공개는 주애의 등장을 앞둔 '빌드업' 과정의 일환이었던 셈입니다.
북미 관계 앞길이 안 보인다면? '우표에게 물어봐'
북한이 '앙숙'인 미국과의 관계를 향후 어떻게 가져갈지도 우표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6·25 전쟁 중인 1952년 첫 '반미 우표'를 내놓은 뒤 꾸준히 발행해왔죠. 정 연구원의 논문 '북미·남북관계 북한우표의 함의와 상징주의 분석'에는 반미 우표들이 소개돼 있는데요. 도안에는 북한 사람이 미군 얼굴에 주먹질을 하며 '양키, 이놈!'이라고 윽박지르거나 미국 미사일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강경에는 초강경으로!'라는 거친 문구가 수도 없이 담겼죠.
하지만 북한은 2018년 한반도에 대화의 훈풍이 불자 반미 우표 발행을 중단합니다. 이후 지난해까지 5년간 반미 우표를 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2019년 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만나 북핵 문제를 두고 담판했음에도 결렬된 '하노이 노딜' 이후에도 반미 우표를 내놓지는 않았습니다.
주목되는 건 올해 6월입니다. 북한은 6·25전쟁이 시작된 6월 25일부터 휴전일인 7월 27일까지를 '반미 공동투쟁 기간'으로 정하고, 이때 미국을 비난하는 우표를 발행해왔는데요. 특히 북한은 한미 정상이 지난 4월 회담에서 '워싱턴 선언'에 합의하자 그 직후부터 미국을 집중 비난해왔습니다. 이에 올해 다시 반미 우표를 발행할 가능성이 거론됩니다. 만약, 반미 우표를 내놓는다면 북미 간 극적인 대화는 기대하지 말라고 북측이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존엄' 작은 키 허용할 수 없었나…남북정상회담 우표는 이미지 보정되기도
북한 우표는 주민을 결속시키는 중요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은 “북한 당국이 인민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우표에 담아 발행하는 일이 많다”면서 “정권과 인민의 소통 도구인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전선동은 일상에서 단순하고 동일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전파해야 효과를 높일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우표는 매우 유용한 수단인 셈이죠.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건 김정은 일가를 의미하는 '백두혈통'의 권위가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표 속 이미지가 조작되기도 하죠. 대표적인 사례가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기념해 발행한 우표인데요. 김정은 위원장과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키를 교묘히 조작한 겁니다. 김정일의 키는 162㎝로 알려졌는데 우표 속 도안에서는 김대중(173㎝) 노무현(168㎝) 전 대통령과 거의 비슷하게 표현돼 있습니다. 또 190㎝의 거구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170㎝인 김정은의 키 차이가 우표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김정일·김정은 부자는 키높이 구두를 애용할 만큼 콤플렉스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우표에서도 '최고존엄'의 위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이미지를 조작한 겁니다.
우표는 수출길이 막힌 북한의 외화벌이 수단이기도 합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목록에 우표가 빠져있기 때문이죠. 우표 수집가들에게는 희소성 있는 북한 우표가 탐나는 아이템이라네요.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이후 북한 우표의 해외보급을 위해 러시아, 중국 등에 조선우표사의 해외지사를 확충했고 2021년에는 인터넷 쇼핑용 대외 홈페이지를 만들기도 했죠.
사소한 듯 보이는 북한 우표는 이처럼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남 원장은 “통일부를 비롯한 우리 당국도 북한 우표처럼 미시적인 부분까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면서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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