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중국과 디커플링 아닌 ‘디리스킹’ 택했다
“우린 여러 전선과 많은 다양한 이슈에서 중국에 관여하고 있다. 그러는 동시에 중국과 경쟁해야 하고, 중국에 대한 의존이 너무 크고 매우 위험해지기 전에 이를 줄여야 한다.”
주제프 보렐 외교안보 고위대표(유럽연합의 외교장관에 해당)가 12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럽연합(EU)의 대중 정책을 수정하기 위한 27개 회원국 외교장관 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에 나섰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취임 이후 미-중 간의 전략 경쟁이 첨예해지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와 중국의 전략적 연대가 강화되면서 유럽연합은 중국과 관계를 재설정해야 하는 난제를 떠안게 됐다. 이런 고민스러운 상황을 보여주듯 유럽연합 외교장관들의 이날 회의는 장장 네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유럽연합이 이날 내린 결론은 중국과 관계 조정은 필요하지만, 그 방향은 디커플링(관계분리)이 아닌 디리스킹(위험완화)이라는 것이었다. 보렐 대표는 이날 “최근 중국 국내에서 일어난 변화와 대외 정책의 흐름을 생각해볼 때 우리의 대중 전략을 재고(recalibration)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선에 (유럽연합 외교장관들이) 동의했다”고 말했다. 이어 유럽연합의 기존 입장대로 “중국이 (체제에 대한) 라이벌이며 (관심 분야에 대한) 동반자이고 (경제적으로는) 경쟁자라는 세 방면의 접근이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에 이를 유지하겠다”면서도 “최근엔 라이벌이라는 면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고 그와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에서 복잡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중국 국내에서 일어난 변화’란 신장에서 자행된 위구르족에 대한 인권 탄압이나 홍콩의 송환법·보안법 사태에서 드러난 민주주의 압살 정책, ‘대외 정책의 흐름’이란 지난해 2월 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중국의 불투명한 태도와 대만에 대한 군사적 위협 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이 계속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유럽연합이 지금까지 중국을 바라봐온 다면적인 인식틀(동반자·경쟁자·라이벌)을 바꾸진 않더라도 ‘라이벌’이라는 측면에 무게 추를 옮길 수밖에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보렐 대표는 자신들이 추구하려는 디리스킹의 방향에 대해선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유럽의 지나친 의존을 예로 들며 “의존이 너무 크면 위험이 따른다”고 말했다. 유럽연합은 태양광 패널의 80%, 희토류는 98%, 배터리 광물인 리튬은 97%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유럽대외협력청(EEAS)이 이날 제출한 새 대중 전략 초안에는 중국이 “자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계 질서의 구축을 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진다. 또 유럽의 안보 지형을 뒤바꾼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선 중국이 “러시아를 군사 지원하거나 제재 회피에 협력하면 유럽연합과의 관계가 결정적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고, 대만 사태에 대해선 “민주주의 파트너들과 협력해 일방적인 현상 변경 시도를 저지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주요 7개국(G7)에 속한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정상들은 이날 논의 내용 등을 바탕으로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서 한국 등 인도·태평양 주요국들과 연대를 강화한다는 방침을 밝힐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서구와 중국의 관계는 여러차례 큰 출렁임을 거쳤다. 1970년대 초 미-중 ‘데탕트’ 이후 미국과 유럽은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이는 ‘책임 있는 대국’이 될 것이라 기대해왔다. 하지만 2010년대 초 중국이 동중국해·남중국해 등에서 타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보이고, 반도체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을 맹추격하며 서구의 대중 정책 역시 크게 바뀌게 된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국가안보전략’(NSS)에서 “국제 질서를 재편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유일한 경쟁자”라고 못박았다. 유럽연합 역시 중국이 ‘전략적 파트너’라는 전통적인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2019년 3월 내놓은 대중 전략 문서인 ‘유럽연합·중국 전략적 조망(a strategic outlook)’에서 중국이 ‘동반자이자 경쟁자이자 라이벌’이라는 복합적인 규정을 내렸다. 6월 말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선 2019년보다 중국에 대해 더 강경한 입장을 밝힌 새 대중 정책이 최종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이날 회의에 앞선 3월30일 대중 정책 관련 연설에서 이런 노선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중국과 디커플은 가능하지 않으며 유럽에 이익도 되지 않는다. 우리의 관계는 흑백이 아니다”라며 “우리는 디리스크(위험완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유럽연합에 중국은 지난해 최대 수입국(6260억유로어치 수입)이자 3대 수출국(2303억유로어치)이었다. 지금까지 유지해온 대중 정책을 단번에 흔들지 않고 변화된 환경에 맞게 조정해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자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지난달 27일 브루킹스연구소 강연에서 지난해 미-중 무역량이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우린 중국과 책임 있게 경쟁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선 협력하려 한다”고 말했다.
유럽연합의 이러한 실용적 접근법은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내몰린 한국에도 적잖은 교훈을 던진다. 유럽은 중국에 자신들이 원하는 관계의 모습을 명확히 밝히면서도, 양자 관계의 복잡성을 단순화하지 않고,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친미냐 친중이냐’란 양자택일 구도에 빠져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한국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니콜라 베어 유럽의회 부의장은 15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유럽의 대중 접근이 “디리스킹이 될지 디커플링이 될지는 중국에 달렸다. 중국이 규칙에 기반한 질서에 따라 (시장에서) 공정한 조건을 제공하고 일방적인 현상 변경을 시도하지 않기 바란다”고 말했다.
베를린/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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