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깃한 생선 아래 새콤한 밥 알알이… 뭉쳐야 산다[이우석의 푸드로지]
소금에 생선 절이고 곡물 쪄내
보존성 높인 초기의 ‘나레즈시’
막부시대 들어‘한입 초밥’나와
밥알에 식초 뿌리며 풍미 더해
17~19세기 도쿄서 선풍적 인기
日선 문상객에 대접문화도 생겨
오이·낫토·아보카도·소고기 등
가지각색 재료로 입맛 돋우기도
초밥의 인기가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미식 가이드북으로 유명한 미쉐린 가이드 역시 일본과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초밥집에 수많은 별을 붙이고 있다. K-푸드 한식의 인기 이전부터 초밥의 진출이 있었다. 요즘 대한민국 젊은 층의 외식 버킷리스트에는 초밥이 반드시 상위권에 들어 있다.
초밥(醋-밥)은 일본 요리 중 큰 분류에 속하는 스시(壽司)의 순화어다. 식초를 섞은 밥 위에 재료를 얹어 먹는 조리법을 그대로 적용한 작명이다. 생선 초밥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어 스시(すし)의 어원은 ‘시다’는 뜻의 스시(酸し)다. 원뜻과는 달리 이를 다양하게 표기하는데, ‘목숨을 맡긴다’는 수사(壽司), 젓갈 지(지), 젓갈 자(자) 등으로 쓴다. 좋은 뜻을 골라 음차해서 쓴 ‘수사’는 그렇다 치고, 아예 전용 한자가 있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일본에서 중요한 요리 분야인지 상상할 수 있다. 초밥집 간판을 유심히 보면 지(지)는 주로 도쿄(東京)에서 쓰고 자(자)는 간사이(關西) 지역에서 많이 쓴다.
초밥을 대표하는 건 글자 그대로 시큼한 맛으로 보존성을 높인 밥 위에 재료(주로 날생선)를 올려 먹는 방식이다. 이 초밥의 이름은 쥔 초밥, 즉 니기리(にぎり)즈시라 한다. 주로 에도(江戶)시대(17∼19세기)에 에도(도쿄)의 상점과 노점을 중심으로 유행했기 때문에 에도마에(江戶前)즈시라고도 부른다. 만화 ‘미스터 초밥왕’이나 요즘 유행하고 있는 오마카세(お任せ·맡김메뉴) 초밥집에서 내오는 것이 보통 니기리즈시다.
하지만 초밥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생선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요리로 발전한 것은 젓갈류인 어장(魚醬) 문화와도 비슷하다. 즉 한국의 식해는 물론, 쁠라라(태국) 등 동남아시아의 발효 생선 요리와도 결이 같다.
초기 초밥은 나레즈시(熟지)다. 소금을 뿌린 생선과 찐 곡물을 돌로 눌러놓으면 오랜 시간 곡물이 발효되면서 젖산이 생성돼 장기간 보관할 수 있다는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바다생선이 아닌 민물생선을 활용했다는 점도 동남아 초밥 기원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처음엔 생선만 먹다가 밥까지 함께 먹는 방법으로 발전했다. 붕어에 밥을 채워 넣은 후나즈시(부壽司), 미꾸라지나 메기를 발효시킨 도조즈시(추壽司) 등은 이미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후 무로마치(室町)시대 간사이 지방에선 바다생선을 구하기가 쉬워 다양한 초밥이 나왔다. 나무틀에 밥과 다양한 종류의 발효 생선을 채워 넣고 눌러 만들어낸 하코즈시(箱壽司)가 나왔다. 여전히 시큼하고 비릿했지만 그나마 제대로 지은 밥과 함께 맛볼 수 있어 한층 고급스러워진 셈이다. 모양새도 다채로워 당시 교토(京都)에 살던 고관대작의 눈과 입을 충족시키기엔 충분했다.
막부(幕府)시대에 들어 에도 천도 이후에야 앞서 언급한 에도마에즈시가 비로소 등장했다. 바다와 인접한 에도에선 선도 좋은 날생선이나 밥에 식초를 뿌려 초밥을 만들기에 용이했다. 긴 시간이 소요되는 발효 과정이 사라지고 식초를 활용한 현대의 초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조리 과정으로 구분할 때 이를 ‘빨리 만든다’는 뜻의 하야즈시(早壽司)라 한다.
여기에다가 공정도 간단해졌다. 미리 상자에 재료와 밥을 채워 넣고 눌러 만드는 하코즈시의 조리법마저도 번거로웠던지 바로 손으로 밥을 쥐어서 파는 방식이 등장했다. 에도시대 중엽인 19세기 초 에도의 요리사 하나야 요헤이(華屋與兵衛)가 처음으로 니기리즈시를 개발했다고 한다. 요즘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초밥의 원형을 만든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냉장 유통 기술이 발달하며 해산물이 신선 상태로 들어오면서 더 이상 재료에 초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풍미를 위해 밥에 식초를 넣는 작업은 유지되고 있다.
귀족들이나 먹던 고급요리였던 초밥은 니기리즈시로 대중화됐고, 현대에 들어선 대중식사의 범주에 들었다. 일본에선 장례를 치를 때 문상객에게 초밥을 대접하는 문화도 있다. 우리네 육개장과 비슷한 종류다. 값은 천차만별이지만 누구나 지갑을 살짝 열면 초밥 정도는 사 먹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초밥의 인기가 전국적으로 높아지자 다양한 형태가 등장했다. 한입 크기로 밥을 손으로 쥔 다음 재료를 올리는 기본 형태부터, 날치알처럼 흐트러지기 쉬운 재료를 김으로 둘러 올리는 군함말이, 고깔 모양으로 크게 말아주는 나팔말이, 김밥처럼 둘둘 말아내는 말이 등 다양한 모양새의 초밥이 나와 인기를 끌었다. 미국으로 전래된 초밥은 김밥을 뒤집어 말아낸 캘리포니아 롤 형태로 변형돼 새로운 메뉴로 자리 잡기도 했다.
오사카(大阪)에서는 회덮밥식으로 밥 위에 다양한 재료를 얹어 먹는 지라시(ちらし)즈시가 인기를 끌고 있는데, 밥을 쥐는 기술이 필요 없어 누구나 만들기 쉬운 초밥의 형태로 사랑받고 있다. ‘지라시’는 (재료를) 흩뿌린다는 뜻이다. 초밥에 올리는 재료도 다채로워졌다. 크기에 맞게 저민 회를 그대로 올리기도 하지만 간장이나 식초에 절여 쓰기도 하고 살짝 굽거나 아예 삶는 등 특성에 맞게 준비한다.
날생선이나 해산물만 얹는 것이 아니다. 채소나 고기도 올린다. 즐겨 쓰는 채소로는 박고지(간표), 오이(갓파), 낫토, 아보카도, 무의 순(가이와레), 싹눈파(메네기) 등을 쓰고, 소고기나 햄(스팸) 등도 가스 토치로 살짝 구워(아부리) 밥에 올린다. 밥에도 신경을 쓴다. 체온과 비슷한 온도에 입에 넣었을 때 스르르 풀어지는 정도로 쥐는 것을 고급으로 친다. 정작 일본에서 스시는 ‘밥 메뉴’이기 때문에 밥양이 충분해야 한다고 하는데 한국에선 생선이 크고 밥이 적어야 ‘아끼지 않고 제대로 한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알아두면 재미있는 사실로 초밥집에는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용어들이 있는데, 이를 알아두면 여행이나 외식을 할 때 좋다. 주로 카운터(다치) 초밥집 요리사와 손님 간의 소통에서 은어(隱語)처럼 사용된다. 예를 들면 밥에 올리는 재료는 원래 ‘다네’(種·종류 또는 종목)라고 읽어야 마땅하나 초밥집에선 이를 거꾸로 읽어 ‘네타’(ネタ)라고 한다. 밥도 일반적인 단어인 고한(ご飯)이나 메시(飯)가 아닌 ‘샤리’(シャリ)라 한다. 불교의 사리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하고 고대 산스크리트어 샤리(쌀)가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이 외에도 마지막 입가심으로 내는 차(茶)는 아가리(あがり), 생강 초절임은 가리(がり·아삭), 초밥을 올리는 나무도마는 게타(げた·나막신), 김밥인 호소마키(細卷)는 뎃포(鐵砲·조총)마키, 계란말이는 교쿠(ギョク·구슬), 간장은 무라사키(むらさき·보라색), 김은 구사(草·풀), 고추냉이는 사비(さび)나 나미다(淚·눈물)라고 한다. 생강을 씹으면 아삭아삭(가리가리)한다고 가리, 고추냉이를 먹으면 눈물이 난다고 붙인 이름이니 참으로 해학적이다.
초밥 요리사가 한두 명 근무하는 판초밥집이나 오마카세 초밥집의 경우 카운터에 앉아 먹는 방식이 일반적이긴 하나, 대형 초밥집의 경우 홀에 식탁을 두거나 따로 룸을 제공하는 곳도 많다. 특히 1958년대 초 생겨난 회전초밥집은 저렴한 가격에 마치 카운터 식당에 온 것처럼 좋아하는 것을 골라 먹을 수 있어 서민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모든 물가가 양극화로 치닫듯 초밥 장인이 운영하는 일본의 유명 초밥집은 이제 가격이 무지막지하다. 물론 재료 구입에 돈을 아끼지 않고 손님 응대에도 세세한 신경을 쓰니 비싼 값을 받는다. 요즘 한국의 경우도 이에 못잖게 고급화됐다. 미리 정해진 대로 준비해 오마카세로 내는 이들 고급 초밥집들은 점심이나 저녁이 몇만 원에서 최고 몇십만 원에 이르는데도 몇 달간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값에 따라 엔트리급이나 미들급, 하이엔드급 등 구분도 생겼다.
원래 초밥집에서 미리 정해진 대로 메뉴판 메뉴를 주문해서 먹는 방식은 오키마리(お決まり·상시메뉴), 손님이 원하는 네타를 주문해 즉석에서 쥐어서 주는 방식은 오코노미(お好み·선호메뉴)인데 오마카세 방식은 1990년대 이후 생겨나기 시작해 최근 화려한 전성기를 맞고 있다.
서양에선 원래 날생선을 먹는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 다른 음식과 비교해 초밥의 전래가 퍽 더뎠다. 굴이나 연어 정도를 제외하고 생선을 회로 먹는 일을 야만시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투자와 노력 덕분에 식문화의 벽이 낮아져 요즘은 초밥이 고급 음식으로 여겨진다.
다만 서양 초밥집에서 쓰는 재료는 여전히 다양하지 않다. 현지인에게 익숙한 연어와 참치, 새우 등을 쓰고 아보카도 등 해당 지역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를 찾아내 새로운 스타일의 초밥에 적용했다. 이렇게 등장한 것이 캘리포니아 롤이다. 녹진한 맛을 내는 아보카도를 참치 뱃살 대신 사용해 롤을 말아내고, 김 향기에 기겁하는 미국인들을 위해 거꾸로 뒤집어 말아낸 롤(마키) 형태가 나오니 당장 인기를 끌었다. 햄과 치즈, 버터, 과일을 쓰는 것도 여기서 생겨난 레시피다.
간단히 밥을 집어 먹어 편하고 좋아하는 재료를 골라 먹을 수 있는 초밥은 이제 국적을 넘어 세계 많은 이가 선택하는 외식 메뉴가 됐다. 굳이 값비싼 초밥집만 고집할 필요도 없다. 마트에서도 커다란 세트를 판다. 봄날을 맞은 요즘, 제철을 맞은 생선이나 조개도 많이 나온다. 입맛 없을 때 달달하고 새콤한 초밥 한 점 입에 넣고 봄 내음을 즐겨보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맛볼까
◇이요이요스시 = 오마카세 메뉴를 어느 정도 가벼운 가격에 즐길 수 있는 전문 초밥집. 제철 재료를 먹기 좋도록 즈케나 아부리 등으로 다양하게 손질해 하나씩 쥐여 준다. 살짝 단맛이 감도는 샤리도 부드럽다. 네타의 질도 좋고 양도 넘칠 정도. 카운터의 응대도 훌륭하다. 서울 마포구 마포대로 167. 점심 5만 원. 저녁 8만 원.
◇목포해태초밥 = 젊은 층이 모이는 평화의 광장에 위치한 해태초밥은 가볍게 정통 일식 초밥을 즐길 수 있는 집. 신선한 해물 재료를 사용해 만든 초밥과 참다랑어 회 등을 차려낸다. 초밥을 주문하면 일식 라면과 튀김 등을 함께 내준다. 화려한 구성의 시그니처 메뉴가 맛있다. 전남 목포시 평화로 105 1층. 2만1000원.
◇삼송역회포차 = 싱싱한 생선회를 크고 두툼하게 썰어 주는 회 전문 식당으로 늘 줄을 서는 맛집이다. 광어나 모둠회를 주문하고 초밥을 시켜 회 한 점을 올려 먹으면 초밥의 즐거움까지 즐길 수 있다. 부들부들한 샤리가 담백하면서도 씹는 맛이 좋아 흰 살 생선이나 연어 등에 잘 어울린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동송로 70. 광어회 2만8000원부터.
◇천이오겹살 = 냉동삼겹살로 유명한 합정 천이오겹살이 대방동에도 생겼다. 고기를 먹다가 냉삼초밥을 주문해 고기를 올려 먹으면 이게 또 별미다. 하코즈시처럼 빚어낸 초밥에 바삭하게 구워낸 삼겹살이 어울린다. 초대리를 한 밥은 간도 크기도 적당해 고추냉이나 젓갈 중 아무거나 올려도 맛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 105. 냉삼초밥 4000원.
◇스시노미찌 = 오키마리(상시메뉴)로 파는 집이다. 전채부터 초밥, 우동(매운탕)까지 내는 코스와 저녁 세트도 좋고, 다양한 종류를 딱 즐길 만큼 내주는 점심 세트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점심은 흰 살 생선부터 다랑어, 연어, 군함말이, 달걀말이 등을 내준다. 서울 양천구 목동동로 293 현대41타워.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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