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 엄영수, '한국 코미디언 비사' 집필 "내년 쯤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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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는 '희극인 집사'로 불린다.
"세상 인심은 어디나 다 똑같습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막상 떠나고 나면 공과는 다 있게 마련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사랑했던 동료 희극인을 외면해선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엄영수는 서세원 김정렬과 셋이 뭉쳐 데뷔 초창기 코미디 콩트 '발명품 코너'를 함께 한 시절이 있었다.
이에 앞서 얼마 전부터는 LA 조선일보에 '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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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조선일보에 '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연재
'희극인 집사', 고 서세원 장례식 주도 '뚝심의 사나이'
[더팩트ㅣ강일홍 기자] 엄영수는 '희극인 집사'로 불린다. 이런 별칭은 개그계 동료들이 붙여준 영예로운 꼬리표다. 20여년째 대한방송코미디언협회를 이끌며 선후배들이 모두 인정하는 '봉사의 길'을 걸어온 덕분이다.
몸에 밴 겸손과 성실함으로 선배들한테는 무한 신뢰를, 후배들한테 존경을 받는 방송인으로 자리매김돼 있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금전적 손해를 보더라도 그에겐 인간적 의리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개그맨 서세원이 세상을 떠났을 때 보여준 그의 의리는 '작은 거인'의 면모로 비쳤다. 과거사에 매몰돼 설왕설래할 때 그는 주변을 설득해 코미디협회장으로 밀어부쳤다.
"세상 인심은 어디나 다 똑같습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막상 떠나고 나면 공과는 다 있게 마련이죠.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사랑했던 동료 희극인을 외면해선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엄영수는 '캄보디아 현지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갑작스런 죽음에 따른 가십성 기사가 난무하는 상황을 마음 아파했다. 일반인 의견을 수렴하고 협회원들의 생각을 전화통화로 일일이 확인했다. 그리고 유족들의 동의를 받아 서세원과 한 시대를 동고동락한 동료들의 마음을 담아 마지막 길을 보내주기로 했다.
영결식장에서 기습적으로 감행한 후배 김정렬의 '숭구리당당 깜짝쇼'도 그의 발상이었다. 엄영수는 서세원 김정렬과 셋이 뭉쳐 데뷔 초창기 코미디 콩트 '발명품 코너'를 함께 한 시절이 있었다. 43년전 일이다.
"다음생에 우리는 무엇으로 만나야 하나요. 탄생은 기쁨이요, 죽음은 슬픔입니다. 생로병사로 돌아가는 마당에 슬픔만 남기는 건 옳지 않습니다. (희극인으로 살다간 고인에게) 마지막 가시는 길 기쁘게 잘 가시라고 부드럽게 가시라고, 뻣뻣하지 않고 웃으면서 가시라고 숭구리 당당 숭당당 수구수구당당 숭당당."
행여라도 망자나 유가족에게 누가 될까 걱정한 염려는 기우였다. 김정렬의 숭구리당당 춤은 엄숙하고 고요했던 영결식장을 오히려 요동치게 했다. 동료들은 웃음이 아니라 북받치는 감정을 서로 이기지 못해 손을 잡고 부둥켜 안고 실컷 울었다. 희극인들의 삶은 슬퍼도 웃고 웃어야하는 게 운명이다. 가슴에 쌓인 응어리까지 단번에 씻겨냈다.
엄영수는 박학다식하다. 매일 주요 일간지를 밑줄을 그어가며 일독하고, 한달이면 10권 이상 책을 읽는 노력 덕분이다. 요즘 그는 코미디언으로 살아온 43년의 여정을 책으로 발간하기 위해 집필 중이다.
이에 앞서 얼마 전부터는 LA 조선일보에 '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를 연재하고 있다. TBC 시절부터 MBC를 거쳐 KBS까지 그의 희극인 생활 중 겪고 보고 느낀 비하인드다. 때론 유쾌한 여운을, 때론 가슴 찡한 감동을, 또 때론 따끔한 촌철살인의 지적으로 공감을 사고 있다.
그는 "연재한 지 3개월째 됐는데 뜨거운 호응 때문에 기고를 중단할 수가 없게 됐다"면서 "내년 쯤엔 세상사람들이 몰랐던 한국 코미디의 비사가 한권의 책으로 탄생할 수 있을 것같다"고 귀띔했다.
엄영수는 1981년 MBC 문화방송 라디오 제1기 개그 콘테스트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지금도 왕성하게 방송활동 중인 최양락이 그의 데뷔 동기다.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폭발하는 인기를 누린 적이 없어도 그의 존재감은 방송 선후배들이 먼저 인정할 만큼 독보적이다.
또 유랑극단 원로 코미디 세대의 바통을 이어받은 '원조 개그맨'으로 7080개그맨과 개콘세대의 젊은 개그맨들을 두루 아우르는 유일한 소통의 끈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40년 이상 본명인 엄용수로 활동하다 코로나 직전 평소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지내는 '연예계 절친 선배' 조영남의 권유를 받아 엄영수로 개명했다. 홍익대학교 공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77년 연극배우로 데뷔한 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ee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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