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내 몫이 아닌 줄"…'대행 전문' 김상식 감독의 반격
"윽박지르지 않는 지도방식 고수…대행 때부터 선수 사기 올려줘야"
(안양=연합뉴스) 이의진 기자 = "이게 꿈만 같아요. 저는 농구에 대한 꿈을 완전히 접어두자고 생각했다니까요."
지난 17일 경기도 안양체육관에서 만난 프로농구 안양 KGC인삼공사의 김상식 감독은 17년이 넘은 '지도자 인생'에서 처음으로 주인공으로 떠오른 느낌을 받았다고 돌아봤다.
그간 그는 철저한 '주변 인물'이었다.
김 감독에게는 김영기 전 KBL 총재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김 전 총재는 현역 시절인 1950년대 중반 한국 농구를 이끌었고, 은퇴한 뒤에는 국가대표팀 코치를 비롯한 지도자와 스포츠 행정가로 이름을 날렸다.
"뭐든 주인공이라는 중심 역할이랑 나와는, 농구를 완전히 포기하려 했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줄 알았다." 김 감독의 말이다.
2003년 선수 생활을 끝낸 김 감독의 지도자 인생은 '대행의 연속'이었다.
2006-2007시즌 인삼공사의 전신인 KT&G의 감독 대행으로 지휘봉을 쥔 게 시작이었다.
당시 유도훈 현 대구 한국가스공사 감독이 KT&G의 정식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수석코치로 돌아갔고, 결국 팀을 떠났다.
2007-2008시즌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 데이원)의 감독 대행을 맡은 후 다음 시즌 정식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해당 시즌 팀의 에이스인 김승현을 비롯한 주축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 악재에 도중 사퇴했다.
당시를 돌아본 김 감독은 "농구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며 "그때 대구 팬 분들이 되게 드셌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선수들의 부상이 이어지던 시기라 너무 힘들었다"고 돌아봤다.
2012-2013시즌을 앞두고는 현역 시절 스승이었던 김동광 전 서울 삼성 감독을 따라 삼성의 수석 코치로 부임했다가 2014년 초 김동광 감독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하차한 후 또 감독 대행이 됐다.
"그때 막내 코치가 이상민 코치였다. 또 대행을 맡게 됐는데, 3연승을 하고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정식 감독 이야기가 나와서 내년 목표를 잡았는데 갑자기 이상민 코치가 감독이 된다고 하더라."
김 감독은 2014년을 돌아보며 "이게 아닌가 보다 했다. 계속 뭔가 '이건 아니다'라는 느낌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당시 삼성은 팀의 남은 시즌을 수습한 김 감독 대신 이상민 코치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김 감독의 '잔혹사'는 국가대표팀에서도 이어졌다. 코치로 보좌한 허재 감독이 '선수 선발 논란' 속 2018년 사퇴하면서 임시 소방수로 직책을 맡게 됐다.
이후 '대행 딱지'를 떼고 본격적으로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서 순탄하게 이어지는 듯했던 김 감독의 지도자 경력은 2021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변곡점을 맞았다.
당시 코로나19 여파로 대표팀 운영이 어려워진 가운데 선수 차출을 둘러싸고 프로팀 감독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결국 김 감독이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김 감독은 2021-2022시즌이 끝나고 여러 팀에서 감독 교체 바람이 불자 내심 기대했지만 또 좌절했다.
1968년생인 김 감독은 "50대 중반을 넘기면서 '아 이제는 젊은 지도자를 원하는구나' 싶었다"며 제주도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농구와는 인연을 끊으려 했다.
지도자 직책에 집착하는 모습이 자신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줬다는 생각에 농구 인생을 모두 묻어두려 했다.
주거지 등 터전을 제주도로 완전히 옮긴 지 2주 만에 농구계는 김 감독을 불렀다. 지난해 4월 허재 전 국가대표팀 감독 모친상 소식을 듣고 제주를 떠난 김 감독에게 인삼공사 측이 감독직을 제안한 것이다.
2022-2023시즌 정규리그를 1위(37승 17패)로 마친 김 감독의 인삼공사는 동아시아 클럽 대항전인 동아시아 슈퍼리그(EASL)에서도 초대 우승팀으로 등극했고,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는 디펜딩 챔프 서울 SK와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4승을 챙겨 왕좌에 올랐다.
지도자 경력의 '대반전'을 이룬 김 감독은 "기대와 좌절이 반복됐다. 가족들이 내가 대행 신분인데도 정식 감독직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니 '안 되겠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차를 배에 싣고 제주도로 가기로 한 것"이라며 "가면서 농구는 이제 접자고 결심했다"고 돌아봤다.
이번 시즌 김 감독이 보여준 리더십은 '부드럽고 상식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선수단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윽박지르지 않고, 말로 먼저 타이르고 격려부터 건네는 지도 방식이 시즌 내내 중계 카메라에 포착됐다.
김 감독은 이 역시 오랜 대행 생활에 따라 형성된 '불가항력적' 지도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젊었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강하게 혼도 내고 그랬다"고 웃은 김 감독은 "대행 생활의 경험이 있다. 감독님이 나가시면 선수들이 죄송한 감정이 있는데 그때 윽박지르기 어렵다"며 "다독이는 식으로 선수단을 챙겨봤는데 결과가 나쁘지 않더라. 우리끼리 열심히 해보자고 했던 게 성과로 이어진 좋은 기억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도 속에서 나오는 감정들을 참는다. 억눌러야 할 때는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감독은 1패를 더 안으면 그대로 탈락하는 서울 SK와 챔피언결정전 6차전(7전 4승제)에서 47-60으로 뒤지던 3쿼터 종료 4분여 전 작전 타임 때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최대한 참고, "벌어진 걸 신경 쓰지 말고 우리 플레이를 하자고"라고 선수들을 다독였다.
당시 표정을 잔뜩 굳힌 김 감독의 작전 타임 후 인삼공사는 4쿼터부터 대릴 먼로를 중심으로 SK의 지역방어를 풀어 헤치며 프로농구 역사에 남을 짜릿한 역전극을 썼다. 이때 동력을 바탕으로 연장까지 간 7차전을 잡고 어렵게 우승 트로피를 들 수 있었다.
김 감독은 자신의 리더십이 일반화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윽박지르고, 따지는 지도법이 선수를 주눅 들게 만들더라도 감히 '그르다'고 재단할 자격이 스스로에게는 없다고 본 것이다.
김 감독은 "모든 게 결과론"이라며 "특정한 방식이 잘 풀려서 결과를 내면 '역시 선수들에게는 가혹하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질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뭐라고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도 내 방식을 고수하겠다. 윽박지르지 않겠다"며 "선수들이 경기에 나서면 기본적으로 친지, 지인들이 많이 온다. 팬들도 있는데 그 앞에서 공개적으로 질책하는 게 맞는지 문제의식은 있다"고 힘줘 말했다.
김 감독은 이번 우승이 전략적 쾌거라고 본다. 팀에 이식한 '모션 오펜스'가 성과를 냈다고 믿는 것이다.
고양 데이원으로 떠난 전성현 등 '주포'로 불리는 선수에 의존했던 2021-2022시즌과 달리 김 감독은 모든 선수가 공격에서 제 몫을 하는 전술을 인삼공사에 심으려 했다.
필리핀 선수 렌즈 아반도를 비롯해 배병준, 정준원, 문성곤 등 외곽 공격수뿐 아니라 오세근, 한승희, 오마리 스펠맨 등 빅맨까지 모두 유기적인 패스워크에 따라 개인의 공격력을 뽐내는 농구를 펼치려 한 것이다.
모든 포지션의 선수가 공격할 공간을 확보하려 움직이고, 패스가 나오는 각도·위치를 인지하면서 상대 수비 앞에서 적극적으로 돌파·슛을 시도하는 농구를 다음 시즌에도 선보이겠다는 계획이다.
김 감독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음 시즌이 도전"이라며 "이번 챔프전이 '역대급'이었다는 호평을 주변에서도 많이 들었다. 농구 인기가 조금이라도 살아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했다.
챔프전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펼친 적장 SK의 전희철 감독을 언급하며 "고생했다고 했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고 했다"며 "전 감독도 그렇겠지만 나도 정말 챔프전 기간 죽는 줄 알았다. 쓰러지는 줄 알았다"고 웃었다.
pual0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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