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논단] 행복을 두고 신과 다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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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행복해지고 싶은 달이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지목되는 행복은 일반적으로 '마음이 충족된 상태'를 말한다.
이들은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욕망 자체가 제거된 마음의 상태로 행복을 취할 수 있다고 믿으며 다음의 강령을 따른다.
욕망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상태는 돈과 무관하게 행복을 말하지만, 구체의 현실성이 결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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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행복해지고 싶은 달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지목되는 행복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충족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무심코 이 상태를 욕망이 채워진 상태로 간주한다, 그리고 모든 가치를 환원하는 힘을 갖게 된 돈은 욕망을 채우는 강력한 수단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럴 경우 돈은 행복의 가장 필요한 조건이 된다. 실제로 한 문건에 따르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나라나 계층과 무관히 돈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욕망의 본질은 '채울 수 없는 결핍'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돈으로 욕망을 충족하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돈으로 결핍의 욕망을 채워 마음이 충족된 상태의 행복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무심한 믿음과 달리 사실은 무모하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렇겠지만. 돈으로도 역시 욕망을 채울 수 없다.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욕망의 숙명에 처한 우리 인간의 삶이 행복을 추구할 방도는 없는가? 이 사안에 대해 어떤 이들은 욕망과의 단절을 말한다. 이들은 욕망을 외면하는 금욕의 초월적 태도를 보이며, 욕망을 채우는데 무용한 돈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들은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욕망 자체가 제거된 마음의 상태로 행복을 취할 수 있다고 믿으며 다음의 강령을 따른다. 즉, 행복은 모든 욕망과 단절하는, 그래서 어떤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힘, 즉 부동심(apatheia)에서 온다.
또 다른 입장을 갖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금욕주의가 보이는 비현실적 태도(욕망을 초월하는 이상주의)를 비판한다. 보다 현실적 경향을 띤 이들은 우리 인간의 존재론적 속성인 욕망을 외면하는 초월의 태도 대신에 욕망을 승인하며 욕망을 다스리는 쾌락주의 윤리를 수용한다. 이들에겐 욕망의 존재를 승인하되, 또 다른 '마음의 힘', 즉 욕망(채울 수 없는 결핍)을 제한하는 평정심(ataraxia)이 행복의 조건이 된다. 어떤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행복이 온다. 돈은 행복에 필요하지만, 공허한 욕망(맛있는 음식, 좋은 옷, 화려한 집)이 아닌 필수의 욕망(의식주)을 위한 정도다. "빵 하나와 물 한 잔을 주면 신과 행복을 다툴 것이다"(에피쿠로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이 생각들은 우리가 사는 현대의 사회에서 그 둘 모두 온당한 행복의 논리를 주지 못한다. 욕망을 거부하며 행복에 대한 돈의 역할을 외면하는 태도도 문제지만, 욕망을 승인하되 행복에서 돈의 역할을 무욕에 가까운 욕망과 잇는 타협의 태도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모두 다 욕망에 대한 관조(觀照)의 윤리로서 욕망과 단절한 혹은 욕망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상태로써 돈과 무관할 행복을 말하지만 구체의 현실성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돈으로 인해 "실제의 삶의 경험"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초래할 문제를 고려한다면, 그리고 "사슬에 묶인 자와 왕좌에 앉은 자"를 동일시하는 행복의 심리를 승인할 수 없다면, 현실적으로 행복과 돈의 관계를 간과하기 어렵다.
물론 돈이 곧바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복은 욕망의 환상을 뚫고 그 아래에 은폐된 나의 진실을 찾아 지키는 삶에 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앗아갈 나의 진실한 가치를 지켜낼 수 있는 돈이면 사실은 충분할 것이다. 이는 일찍이 에피쿠로스가 개인의 심리차원에서 보였던 욕망에 대한 제한의 태도에 함축된 관조적 태도를 극복하며 그것이 가리키는 현실주의 이념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욕망을 멀리서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현실의 가난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는 자리가 아니라, 욕망의 환상을 깨뜨리며 삶의 진실한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시간에서라면 '신과 행복을 다투려는' 에피쿠로스의 삶을 좇지 못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개인의 성실한 노력으로도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그 이념 역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행복의 심리를 넘어 행복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사회-경제적 동물의 정치적 운명은 행복에도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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