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기자 2023. 5. 1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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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해저에서 발견된 대양백합 조개인 밍(Ming)은 507세의 나이로 어처구니없이 죽었다. 나이를 더 정확히 알아보려는 욕심에 연구원이 억지로 조개껍데기를 열었던 탓이다. 1499년에 태어나 2006년에 죽은 이 조개의 나이를 과학자들은 어떻게 짐작했을까? 고목 나이테 세듯 조개의 성장륜(成長輪)을 센 것이었다. 남도 펄에서 자란 꼬막도 성장륜이 뚜렷하고 새끼 꼬막이 자라온 가로무늬 흔적을 드러낸다. 한 해를 지나는 동안 이들은 길이와 폭이 일정한 속도로 커진다. ‘자기닮음꼴’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작년보다 한 치 더 자란 소나무는 가지 끝에 보랏빛 어린 열매를 맺는다. 한 해 전에 맺힌 열매는 제법 야무지게 초록빛을 띠었으나 아직 입을 꼭 다물고 있다. 한 해 더 자라야 흔히 보는 솔방울처럼 입을 열고 비로소 열매를 지상으로 날려 보낸다. 고사리 잎도 서로 닮음꼴을 지키며 자란다. 강의 지류와 본류를 이루는 물줄기 흐름도 고사리 잎과 닮았다. 고사리, 우렁이와 소라 껍데기, 모두 자신의 몸에 역사를 새긴다. 러시아 마트료시카처럼 비슷하게 닮은 인형이 좀 더 큰 인형 안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숨을 쉬면 공기는 두 갈래 상기도를 지나 왼쪽 오른쪽 폐로 들어간다. 거기서 계속 두 갈래로 스무 번 넘게 가지를 쳐 닮음비를 유지하다 마침내 허파꽈리에 도달한다. 공기 흐름이 소용돌이치거나 거꾸로 되돌아 나오지 않게 조심하면서도 좁은 공간에 최대 호흡 면적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이다. 길이가 십만㎞가 넘는 우리 혈관계도 같은 청사진을 바탕에 두고 설계되었지만 액체인 혈액을 멀리 보내는 일은 힘이 더 든다. 펌프인 심장이 생긴 까닭이다. 임신 4주가 지나자마자 배 속 태아 심장은 붉게 뛰기 시작한다. 놀라운 일이다.

심장은 소화기관에서 흡수된 뒤 간을 지나온 영양분과 폐에서 얻은 산소를 이끌고 온몸 곳곳을 찾아간다. 마침 필요한 곳에 먹거리를 공급할 참이다. 이들의 최종 기착지는 미토콘드리아다. 세포 발전소라 불리는 이 소기관은 절반으로 쪼갠 포도당을 장작 삼아 태우면서 산소를 소비한다. 일본 생물학자 모토카와 다쓰오는 사람이 극한운동을 할 때 산소의 9할이 골격근으로 향한다고 진단했다. 얼추 체중의 절반에 이르는 골격근에는 전체 미토콘드리아의 80%가 들어 있다. 인간의 몸은 쉼 없이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애써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심장을 지나온 산소는 하릴없이 날숨으로 나갈 뿐이다.

미토콘드리아 저변에 흐르는 자기닮음꼴은 기하학적이고 해부학적 영역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소기관을 모계에서 물려받기 때문이다. 엄마의 난자에 분포하던 수십만개의 미토콘드리아가 그대로 자손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닮음꼴이 늘 그렇듯이 그대로 판박이는 아니다. 닮되 닮지 않은 현상이 유전자에서 벌어지면 우리는 ‘돌연변이’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사실 이 돌연변이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생명의 본성이다. 우리는 조금씩 변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토콘드리아처럼 식물의 엽록체도 대개 모계 유전한다는 점이다. 공생 과정을 거쳐 편입된 이들 소기관은 한때 자유 생활을 하던 단세포 생명체였다. 이들은 핵심적인 몇 개만 놔두고 자신의 유전자 대부분을 숙주세포에 헌납했다. 따라서 동물이나 식물의 핵 안에 든 유전체는 여기저기서 온 유전자를 짜깁기한 모자이크에 가깝다. 자기 유사성을 간직하면서도 우리 유전체는 변화를 거듭해왔다. 거기에는 시간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약 2500만년 전 인간의 조상을 침범했던 어떤 바이러스는 놀랍게도 이들의 성세포에 자신의 유전자 일부를 끼워 넣었다. 그 유전자가 만든 신시틴(syncytin)이란 단백질 덕분에 우리 영장류 조상은 알을 낳는 대신 자신의 몸 안에 ‘아기집’을 부착하는 신기술을 터득했다. 세대를 잇는 태반에 자기닮음꼴 혈관이 건설되고 모계의 폐와 간을 거쳐온 산소와 영양소가 고스란히 태아에게 전달된다. 흥미로운 건 우리 유전체의 약 8%가 바이러스에서 온 것들로 채워졌다는 점이다. 그보다 빈도는 낮지만 세균에서 유래한 유전자도 제법 된다. 인간은 키메라다. 지구 역사를 수놓았던 생명체들은 자신의 흔적을 이런저런 닮음 형태로 남긴다. 우리의 유전자를 구성하는 DNA 하나하나에, 미토콘드리아의 에너지 합성 효소에 그리고 부모 형상이 담긴 내 얼굴에 닮음투성이다. 닮되 똑같지 않음이 곧 생명의 역사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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