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K-판타지가 현실이 된다
- 일연이 군위 인각사서 편찬한 내용
- 테마파크로 조성한 ‘신박한’ 관광지
- 공원 입구 신비한 기운의 ‘신화목’
-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 등 벽화로
- 특산품 마늘과 웅녀설화 접목한 동굴
- 이사부가 울릉도 점령때 만든 사자상
- 발 닿는 곳마다 재밌는 이야기 가득
경북 군위군 의흥면 일연테마로 100. 이것은 2020년 문을 연 ‘삼국유사테마파크’의 주소다. 길 이름에는 ‘삼국유사’를 지은 고려 시대 일연 스님의 법명이 들어가 있고, 테마파크 이름에는 ‘삼국유사’가 있다. 책 이름을 딴 테마파크가 세계에 또 있을까. 호기심이 치솟았다. 국제신문은 고전학자 정천구 박사가 집필한 ‘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 기획시리즈를 2020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매주 한 차례씩 모두 25회 연재했다. 이 시리즈 첫회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삼국유사’는 21세기 ‘우리’ ‘한국인들’이 보여주는 기질과 정서, 사유 세계 그리고 전 세계인이 공유하고 즐길 한국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이미 700년 전에 통찰한, 시간적으로 앞선 최고(最古)의 한국학이며 수준에서 앞선 최고(最高)의 한국학이다. 잊어버린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아서 ’삼국유사‘와 한판 걸게 놀아보자!” 이 부문 권위자인 정천구 고전학자는 “‘삼국유사’와 한판 걸게 놀아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해 군위의흥면 일연테마로에 ‘삼국유사테마파크’가 생겼다. 진짜로 ‘삼국유사’와 ‘놀 수 있게’ 됐다.
▮ 군위와 일연 대선사의 인연
왜 군위일까? 고려에 무신정권이 이미 들어서 있던 1206년 지금의 경북 경산시 압량읍에서 일연 스님은 태어났다. 아홉 살 때 현재 광주광역시 권역인 해양(海陽)의 무량사로 옮겨 가 절간 생활을 시작한 뒤로 일연 스님의 삶을 관통한 두 가지가 있다. 평생 한반도 곳곳을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살아간 이동과 여행의 삶 그리고 맹렬한 수행·정진, 공부·독서·연구였다.
충렬왕은 1283년 일연 스님을 국존으로 책봉했다. 어머니가 아흔여섯 연세로 돌아가신 뒤 조정은 경북 군위군 고로면 인각사를 일연 스님이 머물 곳으로 정하고 후원했다. 일연 스님은 1289년 입적할 때까지 인각사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펴냈다. 군위가 삼국유사테마파크를 품은 인연이다.
▮신화목(神話木)이 먼저 반겨주고
삼국유사테마파크는 깨끗하고 고즈넉한 느낌과 시원하게 트인 인상을 동시에 주는 터에 자리 잡았다. 출입문을 지나 조금 걷자 저 멀리서 아주 크고 신비한 기운을 뿜는 나무가 손짓한다. 나무 형상의 저 조형물은 신화목(神話木)이다. ‘이 커다란 나무 조형물 밑둥치에 출입구가 나 있어 속으로 들어가면 원효 스님이 해골 물 마시는 순간을 비롯해 다양한 장면을 그려놓았다.
비로소 단군신화부터 김알지와 탈해왕, 연오랑과 세오녀, 처용랑과 망해사, 가락국기, 황룡사의 구층탑, 김현감호, 계집종 욱면이 염불하다가 서쪽 하늘로 올라간 이야기, 만파식적 등 한민족의 갖가지 신화·설화·이야기의 원형을 담은 귀중한 책이 ‘삼국유사’임을 슬슬 느낀다. 신화목은 ‘천지인 신화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 테마파크에는 ‘길’을 여럿 조성해 놓았다. 영웅탄생길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계림의 우물 곁에서 발견된 자줏빛 큰 알에서 태어난 일을 주제로 삼은 길이다. 건국신화길은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발해의 건국 이야기를 벽화로 표현했다.
▮최동훈 감독 “안타깝죠, 진짜 재밌는데”
경로를 따라 걷다 보니 웅녀마늘활성화센터와 웅녀동굴에 들어섰다. 군위 특산품인 마늘을 단군 이야기 속 웅녀와 연결해 재미있게 구성했고 웅녀 탄생 설화도 접하도록 꾸며놓았다.
‘삼국유사’ 자체에 관심이 높은 관람객에게는 아무래도 가온누리관이 핵심 장소다. 1층 상징전시홀, 일연대선사관, 삼국유사관, 신화 써클영상관, 2층 설화체험관으로 이뤄졌다. ‘삼국유사’의 내용과 가치를 체계 있고 재미있게 접하도록 공간을 다채롭게 구성했다. 우리 땅을 누빈 일연 선사, 보각국사비 내용, 일연 선사 모습, 만파식적, 미추왕과 죽엽군, 향가, 신라의 주요 사찰, 원효 스님, 활 솜씨로 용왕의 딸을 얻은 이야기, 연오랑과 세오녀 등에 미디어 아트까지.
‘삼국유사’와 관련된 책을 소개하는 코너도 눈여겨보게 됐는데 이곳에서 책을 곧장 살 수도 있도록 해두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사들이 ‘삼국유사’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문장을 따서 만든 전시물도 흥미로웠다. 경북 군위 출신 소설가·신화전문가 고(故) 이윤기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일연 스님에게 고려의 신화, 설화, 시가 등의 유사(遺事)는 사기(史記)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마침내 돌아가야 할 어머님의 품 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타짜’ ‘범죄의 재구성’ ‘암살’ ‘도둑들’ 같은 극강의 재미를 준 영화를 만든 최동훈 감독의 언급도 흥미롭다. “일연의 ‘삼국유사’요, 언제나 재밌어요. 우리는 어마어마한 판타지를 갖고 있던 민족이었는데 이 멋진 걸, 이 대단한 걸 사람들은 어렸을 때 보고 마는 이야기라 치부한 지 오래죠. 이 책의 귀함에 대해 아는 사람은 너무 잘 알고, 모르는 사람은 영 모르는 듯해요. 안타깝죠. 진짜 재밌는데.”
큰 작가 김훈의 소감도 옮겨 본다. “저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많은 노래와 이야기들은 그가 한 생애에 걸친 유랑의 길 위에서 채집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노래와 이야기들은 모두 잿더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야만과 살육이 시대에 쓸리며 소진되었지만, 원리와 현상이 다르지 않다고 믿었던 점에서 그는 행복한 인간이었습니다.”
▮‘삼국유사’와 놀 수 있는 곳
가온누리관을 빠져나오자 눈앞에는 아주 아주 큰 옛날 사자 조형물이 버티고 앉아 있다. 신라의 이사부가 울릉도를 점령할 때 만들어 효과를 톡톡히 본 그 사자상을 재현했다. ‘삼국유사’에는 한민족의 정서·창의성·기질·민중성·미의식의 원형을 이루는 이야기가 다양하게도 들었다는 생각은 더 뚜렷해졌다. 이곳에는 해룡슬라이드, 해룡물놀이장, 국궁연습장, 숙박시설인 역사돔 등 다양한 시설이 더 있다.
‘삼국유사’를 깊이 연구하고 잘 아는 전문가들이 이 테마파크의 콘텐츠에 관해 어떻게 평가할지는 잘 알 수 없다. 삼국유사테마파크를 한 번 체험해 본 처지에서 말하자면, 아이와 어른이 함께 ‘삼국유사’와 ‘놀면서’ 그 흥미롭고 멋진 세계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꽤 매력 있는 콘텐츠라고 말하겠다. 책을 활용해 테마파크를 만든 발상도 과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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