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헌 책을 꺼내며 먼 기억을 꺼냈다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부모님이 사준 최초의 책은 ‘허클베리핀의 모험’이었다. 나는 제목 그대로 모험에 빠져들었다. 나는 1980년대 초반의 흔한 어린이였고, 우리 집은 시내의 외곽에 위치해 놀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동네친구들과 매일 골목에 모여서 놀았지만, 비슷한 숨바꼭질과 비슷한 골목축구와 비슷한 땅따먹기의 연속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늘 동네에서 펼쳐졌기에 우리의 놀이도 동네 이상의 상상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동네에서 시작해서 동네에서 끝나는 놀이가 슬슬 지겨워질 무렵, 생전 처음 선물받은 ‘책’이라는 존재는 순식간에 나를 지구 반대편의 미시시피강으로 데려다주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제발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하지 않기를 바랐다.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했고, 책장을 덮자마자 나는 또 다시 동네의 세계로 돌아왔다.
이 엄청난 상상의 모험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은 오직 책을 사 모으는 계획으로 가득 찼다. 책을 사기 위해 책 이외의 것들을 친구들에게 팔았다. 장난감을 팔고 축구공을 팔고 자전거를 팔았다. 어떤 날은 생일선물로 받은 운동화를 친구의 전래동화 전집과 바꾸기도 했다. 처음에는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는 보람으로 책을 사 모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책을 사 모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언젠가 읽을 것 같은 책, 지금 안 사면 못 살 것 같은 책, 그저 제목이 좋아서, 그저 표지가 예뻐서 사 모으는 책들이 늘어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게 되면서, 생활에 들어가는 모든 돈을 스스로 벌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 막 연극을 시작한 20대는 여유가 없었다. 집세와 식비와 교통비를 감당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책 한 권을 사려면 밥 한 끼를 굶어야 했다. 밥을 굶으면 허기가 찾아왔고, 책을 못 사면 마음의 허기가 찾아왔다. 허기가 찾아오면 서글펐고 마음의 허기가 찾아오면 쓸쓸했다. 두 허기를 모두 채우고 싶었다.
헌책방 순례를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다. 만원을 들고 서점에 가면 시집을 한 권 살 수 있었지만, 헌책방에 가면 시집 한 권과 소설 한 권을 살 수 있었다. 운이 좋은 날은 사장님이 책 한 권을 덤으로 주기도 했다. 헌책방 단골이 되면서 책을 사는 기준이 달라졌다. 가진 돈의 액수에 맞춰서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긁어모았다. 책들이 늘어가며 내 나이도 늘어났다. 예전보다는 좀 더 여유롭게 책을 살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인터넷 서점이 생겨나면서 조금이라도 흥미가 생기는 책은 모조리 장바구니에 넣고 주문했다. 때로는 내가 주문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책들이 배달되었다. 책들이 점점 더 늘어나서 책장 밖을 벗어났다. 방바닥에, 식탁에, 옷 방에, 창고에, 침대 옆에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쌓인 책들이 쌓인 숙제처럼 부담스러워졌다. 언젠가 읽어야 할 책들이 가득이었지만 무엇을 먼저 읽어야 할지 고민하느라 그 무엇도 읽지 못했다. 때로는 제목이 익숙하다는 이유로 그 책을 읽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고민 끝에 꼭 필요한 책만 남기고 나머지를 처분하기로 했다. 문제는 어떤 책이 꼭 필요한 책인지 나 스스로도 몰랐다는 것이다. 책장의 맨 위 줄부터 손가락으로 살펴가며 버릴 책을 고르려 했지만, 단 한 권도 버리지 못했다. 책을 집어드는 순간, 책에 관계된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떤 문학전집은 신문배달을 하고 받은 첫 월급으로 샀다. 어떤 시집은 좋아하던 사람에게 주기 위해 두 권을 샀지만 결국 주지 못하고 두 권 그대로 있다. 이 책은 어떤 날 어떤 마음으로 샀고, 이 책을 읽고 얼마나 울었었고, 이 책은 읽고 너무 좋아서 누구 누구에게 선물했었고, 책 한 권이 기억 한 편이었다. 책을 버리는 것이 기억을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책은 계속 쌓여만 갔다. 집 전체를 둘러싼 책들이, 내 마음 전체를 둘러싼 기억처럼 느껴졌다. 떠올라서 좋은 기억도 있었지만, 떠올라서 힘든 기억도 있었다. 책들의 진열이 기억의 진열처럼 여겨져서 종종 어지러웠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싶었다. 책장을 비우면 기억도 비워질 것 같았다.
궁리 끝에 결단을 내렸다. 내 스스로 책을 처분하지 못하면 남들이 내 책을 처분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친구들을 정기적으로 초대해서 술을 마셨다. 친구들이 떠날 때 부탁을 했다. 10분의 시간을 줄 테니 내 방 책장에서 갖고 싶은 책을 딱 세 권씩만 가져가라고. 친구들은 반색을 하며 책을 골랐다. 친구끼리는 닮아가는 것인지, 정말 좋은 책들만 챙겨갔다. 000의 소설집이 사라지고, 000의 시집이 사라지고, 000의 에세이가 사라졌다. 친구들이 떠나고 책장의 텅 빈 칸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더 많은 책이 사라질 것이고, 내 많은 기억이 홀가분해질 거라고. 하지만 며칠이 지난 후, 나는 계속해서 책장의 텅 빈 칸만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빈 칸을 바라보면 사라진 책이 떠올랐고, 사라진 책을 떠올리면 사라진 기억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책을 주문했다. 새로운 책이 아닌, 000의 소설집을, 000의 시집을, 000의 에세이를 주문했다. 사라진 기억을 딱 한 번만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타이슨 엉덩이만 봤다”…6000만명 몰린 이 경기, 불만 폭주한 이유
- 어린이집 앞 상가서 성매매...3억 5000만 벌어들인 업주 등 송치
- 먼지 자동으로 비우고 물걸레까지, 평점 4.8 로봇 청소기 20만원 대 특가
- Big Korean firms compete for junior talent
- “가격 올라도 괜찮다” 손님이 휴지에 써 전한 진심… 사장 울렸다
- 현대차 ‘TCR 월드투어’ 2년 연속 우승
- [추모의 글] 이시윤 선생을 기리며
- 강혜경, 명태균‧김영선 구속에 “사필귀정… 빨리 진실 말씀하라”
- 의협 '박형욱 비대위' 확정... 박단 전공의 대표도 합류
- 서울시 ‘외국인 마을버스 기사 도입’ 추진...“외국인 1200명 필요...내년 시범사업 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