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다시 없는 오늘, 다시없는 오늘
5년 만에 시집이 나왔다. 책이 나오기 직전과 나온 직후에는 글쓰기가 유독 어렵다. 처음에는 새 책이 나온다는 데서 오는 희열과 나왔다는 데서 오는 흥분 때문인 줄 알았다. 희열을 잠재우고 흥분을 가라앉히면 뭐라도 한 줄 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격양의 빛을 한시라도 빨리 사라지게 해야 했다. 여느 때처럼 산책하고 메모하고 가만히 상념에 잠기는 시간을 가졌다. 루틴을 지켜야만 쓰는 몸과 쓰려는 마음이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나는 결국 글을 쓰지 못했다. 단 한 문장도 완성하지 못했다.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들이 서로를 밀쳐냈다. 엉기지 않으면 단어는 말 그대로 ‘홑’으로 존재해야 한다. 간혹 하나의 단어만으로 충분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삶의 맥락에서 튕겨 나가고 만다.
여름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눈!”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고, 시간을 묻는 말에 장소로 답하는 것처럼 어리둥절하다.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서는,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가뭇없어진다.
그럴 때면 몸 안에 있는 것들이 몽땅 빠져나간 사람이 떠오른다. 앎과 기억이 백지상태가 되어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하는 사람.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시작하듯,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고 왼발을 내디딘 힘으로 오른발을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 ‘어마어마한 것’이 어느새 눈앞의 엄마가 되고 “아파!”라고 외치다 곁에 있는 아빠를 발견한 것처럼, 한껏 천진해져야 한다. 홑을 모아 겹을 만드는 일을 묵묵히 수행해야 한다.
시집 제목은 <없음의 대명사>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지금 내 상태를 정조준한 제목 같기도 해서 웃음이 나온다. 말 없음이 사연 없음이 되고, 이것이 기어코 쓸 수 없음의 상태로 연결될 때면 난감하다. 대명사는 또 어떤가. 명사를 대신하는 것이지만, 이는 우리가 특정 명사가 생각나지 않을 때 입버릇처럼 소환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가리키며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고 ‘우리’라고 말하면서 알게 모르게 힘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가. 서로가 생각하는 ‘그것’이 불일치하고 ‘우리’에 나 자신이 속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면 맥없어진다. 현장에서 한없이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대명사는 또한 어떤 속성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요리의 대명사, 절약의 대명사, 웃음의 대명사 등 주변에 대명사가 즐비하다. 그런데 나를 대신하는 것이 가능할까. 무수한 역할을 실천하며 나는 나를 대신하고 있는 것일까. 대명사로 일컬어질 때 혹여 나의 성정이 간과되고 본뜻이 오해되지는 않을까. 답답한 마음에 “없다”라고 말해본다. 헛헛하다. 없으니까 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없음은 한때는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일까. 한때가 이미 지나가서 지금 그것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일까.
울며 겨자 먹기로 한 문장을 쓴다. 다음 문장을 쓴다. 다음 문장이 다다음 문장을 끌고 오기를 기다린다. 조바심이 난다. 다시 보니 처음 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말이 되지 않는다. 기껏 써놓은 문장들을 지운다. 쓸 때는 그렇게 오래 걸리더니 지울 때는 한순간이다. 인정사정없음이다. 온데간데없음이다. 한동안 이렇게 헤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은 실패했구나, 오늘도 실패하고 말았구나 한탄하며 이 시기를 말없이 건너가야 할 것이다.
없음이 들어가는 말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시없음’이다. ‘다시없다’라는 단어는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라는 뜻이다. “오늘이 다시 없다”라고 말할 때 오늘은 고유한 날이 되지만, “오늘이 다시없다”라고 말할 때 오늘은 최고의 날로 변모한다. 없는 상태에서는 있었던 상태가 더욱 생생해진다. 오늘을 살면서 오늘이 명백해지는 것처럼. 한 글자도 못 쓴 오늘조차 다시 없어서 절박하고, 다시없어서 소중하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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