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보릿고개와 어머니
내 어릴 적 오월은 온통 초록 보리밭이었다. 늦가을 뿌린 씨앗들이 엄동설한을 이기고 빼곡히 들녘에 차 올라 일렁이는 모습은 매혹 그 자체였다. 이랑 사이를 거닐며 콧노래도 부르고 연하디 연한 이삭을 어루만지며 가슴에 사랑을 그려 보기도 했다. 낭만과 설렘, 그리고 잔잔한 추억이 아직도 가슴에 그대로 들어있다.
그와 더불어 진한 아픔 하나가 묵직하게 마음을 파고 든다. 긴 한숨 소리, 쌀 독 바닥을 긁는 아침, 종종걸음으로 이 집 저 집 돈 꾸러 다니는 조바심....
내 어머니의 가난한 오월이었다. 10남매의 맏며느리, 여덟 자식의 젖가슴, 그렇게 강하지 못한 한 남자의 아내!
고생일 수밖에 없었고 눈물의 나날이었으리라. 시동생들과 시누이들의 투정과 성화는 그분의 삶에 여러 개의 멍자국을 남겼으며 녹록지 않은 살림은 어머니의 애간장을 녹이며 온몸에 잔병을 심어 놓았다. 나는 그 속에서 나고 자랐다. 불평과 심통을 부리며 때로는 원망도 서슴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요구와 그릇된 행실로 날마다 그분을 전전긍긍하게 해 드렸다. 그래도 내 어머니는 “큰일 저지르는 놈이 큰일한다더라” 하시며 등을 두드려 주셨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셨는지 내게 필요한 만큼을 언제나 만들어 주셨다. 10년 전 임종을 앞둔 내 어머니께서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이 돈은 자네의 자존심을 세울 때 당당하게 쓰시게. 누구도 주지 말고 동기간에 나누려고도 말고 오롯이 자네만을 위해 쓰시게” 하시며 적지 않은 현금을 흰 봉투에 담아 내 손에 쥐여주셨다. 사뭇 놀랐다. 많이 뭉클했다. 눈물 범벅이었다. 그분은 철부지 나에게 태산보다 더 큰 자존심을 선물로 남기고 2013년 오월의 보리밭 이랑을 따라 하늘로 가셨다.
“올해는 보리가 유난히 더디 익는다. 어머니의 푸념이었다.” 양식은 벌써 바닥이 났고 오월의 보리밭은 마냥 푸르러 알곡이 익으려면 아직 멀어서.... 해마다 같은 말씀을 하셨다. 많지 않은 밥을 이 그릇 저 그릇에 담으시고 당신은 밥알보다 물이 더 많은 밥으로 끼니를 이으셨다. 지독한 보릿고개였다. 철 모르던 시절에 보이지 않았던 그 고개가 올봄에는 어쩌면 그리 선명하게 짠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그 심술궂은 보릿고개를 내 어머니는 사랑으로 이기셨다. 가난과 고생을 길동무 삼아 침묵으로 뚜벅뚜벅 헤쳐 나오셨다.
투박한 그리움의 잔에 보릿고개와 어머니 마음을 넘치도록 채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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