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노동자 불이익 클 땐 무효”

김혜리 기자 2023. 5. 17.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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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신용정보 노동자들, 사측에 임금·퇴직금 청구 일부 승소
재판부 “임금 삭감에 상응한 조치 여부 종합적으로 따져야”

임금피크제 도입 시 정년을 연장하더라도 임금이 크게 깎이는 등 노동자가 받는 불이익이 과도하면 무효라는 판결이 나왔다. 임금피크제 도입의 적법성을 따질 때 정년 연장 여부만이 아니라 임금 삭감에 상응하는 반대급부가 있는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재판장 정회일)는 A씨 등 KB신용정보 노동자 4명이 사측을 상대로 낸 임금 및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고 17일 밝혔다.

KB신용정보는 2016년 2월 과반수 노조와의 단체협약을 통해 ‘정년 연장형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정년을 만 58세에서 만 60세로 연장하는 대신 만 55세 이상인 직원들에게 성과 평가에 따라 보수를 차등 지급하기로 했다. 예컨대 행정직 직원들은 당초 만 55세부터 58세까지 3년간 기존 연봉의 300%(1년치 연봉의 100%×3)를 받을 수 있었는데, 임금피크제 시행 이후에는 5년 내내 성과 평가에서 S등급을 달성해야만 기존 연봉의 300%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마케팅 직무도 S등급을 1번 이상 달성하거나 A+등급을 2번 이상 달성한 경우에만 기존 연봉의 300%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저성과자의 경우 임금이 최대 45%까지 줄어들게 됐다.

A씨 등은 해당 제도가 합리적인 이유 없이 나이를 이유로 노동자를 차별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 제4조의4 제1항은 ‘사업주는 모집·채용 등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근로자 또는 근로자가 되려는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는데, KB신용정보의 임금피크제는 이를 위반해 무효라는 것이다. 사측은 임금피크제 도입 대가로 정년을 연장했고, 성과와 연동해 보수를 지급하는 건 합리적 차별이라고 맞섰다.

재판부는 노동자 측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개별적인 업무성과 등과 관계없이 근로자가 일정한 연령에 이르렀다는 사정만으로 임금을 감액하는 것은 연령을 이유로 근로자의 임금에 차등을 두는 것”이라고 했다. KB신용정보가 고령자고용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노동자들의 임금이 과도하게 삭감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임금피크제 시행으로 근무기간이 2년 늘어났음에도 만 55세 이후로 지급받을 수 있는 임금 총액은 오히려 삭감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손해의 정도는 결코 적지 않다”고 했다. 또 “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노동조건 중 하나인 임금 삭감이라는 불이익이 초래됐음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업무량이나 업무강도 저감 등 불이익에 대한 대상조치를 적절하게 마련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5월 정년 연장 등 보상조치가 없는 ‘정년 유지형 임금피크제’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후 일부 하급심에서 ‘정년 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적법하다는 판결이 이어졌다. 경영계에선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더라도 ‘정년만 연장하면 괜찮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이번 판결은 임금피크제 도입 시 정년 연장만이 아니라 임금 삭감에 상응하는 반대급부가 있는지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고 판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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