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석 칼럼] 유성룡의 징비록을 다시 읽어야 할 때

2023. 5. 17.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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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석 아름다운서당 이사장·前노동부 차관

'징비록'은 대한민국 국보 132호로 지정된 소중한 역사기록이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그 자신이 전쟁을 총괄 지휘하며 전란을 치뤄낸 생생한 경험을 정리한 책이다. '징비(懲毖)'라는 말은 '내가 그 잘못을 뉘우쳐 경계하여 나무라고 훗날의 환란이 없도록 삼가고 조심한다'는 의미로 유성룡이 유학 경전 시경에서 선택한 것이다.

지금 북한은 핵무기 70여개를 보유하며 대한민국을 '명백한 적'으로 규정하고 핵무기를 선제공격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협박하고 있다. 북한을 적극 지원하는 중국과 러시아도 우리 정부를 상대로 '불장난하면 타죽을 것'이라는 등 모욕적인 언행으로 협박하고 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심히 불안한 안보의 위기상황이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안보문제조차도 정쟁의 대상일 뿐 상대당을 공격하고 정부의 외교 노력을 폄하하는데 여념이 없다. 미국의 정치권은 여야 간에 치열하게 대립하다가도 국가 안보 문제에 관련해서는 여야 없이 한 목소리로 국익을 대변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징비록에서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기에서도 당시 지도층이 정쟁에 몰두한 나머지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가장 대표적인 정쟁의 폐해 사례는 임진왜란 2년 전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고 그 결과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왜적의 침략 징후가 있어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했는데 정사인 황윤길과 부사인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가능성에 대한 판단에서 극단적으로 대치했다.

서인인 황윤길은 왜적의 침략 가능성이 커서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동인인 부사 김성일은 '전쟁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당시 선조를 비롯한 동인 집권세력은 무사안일, 낙관론에 경도되어 같은 편인 김성일의 주장을 채택했다. 회의후 걱정이 된 유성룡이 김성일을 만나 다시 확인하니 김성일은 "나 역시 전쟁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서인인 황윤길이 전쟁가능성이 크다고 보고하여 민심이 동요할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말했을 따름이다"고 변명했다. 당파의 이익을 국가의 안위나 백성의 생명보다 더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가의 핵심 지도층의 책임이 무엇인가. 국가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정치의 최우선 가치라고 유학은 강조한다. 유학은 기본적으로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철학이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유학경전을 학습하고 관료로서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이 정작 당쟁에 직면해서는 국가나 백성의 문제보다 당파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것이다.

징비록에 보면 임금, 상하급 관료, 장군과 군 간부 등 각 부문을 맡은 사람들이 책임감을 갖고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한 실패 사례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소임 실패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공자는 정명론에서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매사에 공자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들 문제에서는 제 소임을 다하지 않고 책임감도 없고 문제가 생기면 남 탓으로 돌리기 바쁘다. 전쟁의 급박한 와중에도 누군가 책임 지울 사람을 찾고 탄핵한다. 선조 임금이 개성으로 피난가는 와중에도 전쟁 지휘부인 정승, 지방수령, 장군들이 탄핵되어 파직되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난다. 유성룡은 영의정에 임명되고도 바로 그날 파직되어 백의 종군하다가 복직되기도 한다.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도 엄청난 승전 공적에도 불구하고 파직되어 옥에 갇히고 사형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주변에 사형만은 면해야 한다는 원로가 있어 백의 종군하게 된다.

정치인을 비롯한 공직자가 자기 맡은 바 소임, 직무를 다하는 것은 국가 안보를 위해서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책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인에게는 이러한 국가관이나 소명의식이 있는가. 국가안보의 문제는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사항이다. 정책에 이견이 있으면 여야간에 치열하게 토론하여 방향을 조율해 나가되, 국가 안보 정책은 정쟁을 떠나 국익을 위해 최대한 협치하라는 것이 국민의 요구이다. 이를 다하지 못하는 정치인은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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