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회사 쪽 교섭위원으로 나온 정규직 조합원, 너무한 것 아닙니까

한겨레 2023. 5. 1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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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2023년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은 자본과 정부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서로 자리다툼하고 있습니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죽을 둥 살 둥 스펙을 쌓고, 경쟁에서 이겨야 하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을 용인합니다. 그리고 비정규직들을 차별합니다. 그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신분이 바뀌자, 경쟁을 통해 된 것이 아니니 예전 비정규직만큼 대우하면 된다는 차별주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김호경 | 민주노총 공공운수 대전지역 일반지부 지부장

2008년, 38살 늦은 나이에 잡은 첫 직장이 육·해·공군본부가 있는 계룡대 시설관리 쪽이었습니다. 고향 서울을 벗어나 대전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려 했는데 잘되지 않았거든요. 부모님과 아내, 아이 셋이 농가주택에 살면서 월급쟁이로 살아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고, 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가장이었죠. 군무원인 줄 알았던 자리는 비정규직이라 월급이 정규직의 3분의 1이었습니다. 계룡대 시설관리 기사로 일한 지 1년도 안돼 민주노총 조합원이 됐고 2번의 해고와 3년의 천막생활을 했습니다. 서울 0.1%가 산다는 도곡동 타워팰리스 바로 옆, 군인공제회 앞에서 노숙하면서 조합원들과 함께 투쟁했지요. 결국 계룡대비정규직노동조합 지회장인 저를 제외한 해고자들이 복직하고, 단체협약을 맺으면서 군부대 안 비정규직,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권리를 회복해갔습니다.

저는 뜻있는 분들의 권유와 추천으로 노동운동을 계속하게 됐고, ‘비정규직 종합세트’랄 수 있는 카이스트 노동자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교수님을 비롯해 임금노동자 3천여명이 있는 카이스트에 용역회사는 몇개가 있을까요? 정규직과 무기계약직을 제외한 용역소속 비정규직이 479명(2019년 12월 기준)이었는데, 이들이 소속된 용역회사는 무려 25개나 됐습니다. 한명에서 네명까지 고용한 용역회사도 10개가 넘었습니다. 황당했습니다. 용역회사에 지급하는 일반관리비와 이윤, 부가가치세를 더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해도 되는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 방침에 따라 카이스트도 2019년 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합니다. 2020년 3월 미화, 시설관리, 경비노동자 다수가 포함된 329명이 직접 고용으로 전환됐고, 2023년 현재 조경과 서울캠퍼스 경비직 등 고령의 노동자 100여명은 정년연장 등을 위해 용역소속으로 남아 있습니다.

카이스트 안에서 정규직은 높은 신분이고 비정규직은 낮은 신분이라는 생각은 뿌리가 깊었습니다. 비정규직이었을 때는 “회사가 다르니 정규직노동조합이 우리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거야”라며, 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대의 마음을 전해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자 정규직 조합원들은 비정규직 출신 조합원을 거부합니다. 시설지원노동자들은 따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했지요. 정규직 조합원 중에는 용역소속 비정규직을 관리하는 팀장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학교 시설관리와 안전 쪽 파트이지요. 이들 팀장이 시설지원노동자들과 교섭하는 회사 쪽 위원으로 나왔습니다. 일반직(기존 정규직)들은 같은 노동자로서 학교 경영진에 직접 교섭에 나가도록 촉구하는 대신 자신들이 교섭위원으로 나왔습니다. 물론 정규직 조합원들은 총장 등 경영진과 교섭해왔습니다. 시설지원조합원들도 정규직으로 전환됐으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단결은 어디 가고, 같은 노동자가 신분이 나뉘어 마주 앉다니 큰 충격이었습니다. 회사 쪽 교섭위원으로 나온 일반직 조합원 선배들은 정부와 학교를 대변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전환 당시 합의한 성과평가를 이유로 미화노동자 2명이 해고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두분은 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결정에 따라 지금은 다시 일하고 있습니다.

‘용역으로 일할 때도 해고되진 않았는데’ ‘일반직 관리자가 용역시절 사장이구나!’하는 마음에 슬프고,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우리 시설지원 노동자들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을지언정 당하고 있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일반직 노동조합의 조합원 선배들을 만나 우리 처지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고, 교육을 통해 시설지원 조합원들이 자괴감에서 벗어나도록, 나약해지지 않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됐을까요? 2023년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은 자본과 정부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서로 자리다툼하고 있습니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죽을 둥 살 둥 스펙을 쌓고, 경쟁에서 이겨야 하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을 용인합니다. 그리고 비정규직들을 차별합니다. 그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신분이 바뀌자, 경쟁을 통해 된 것이 아니니 예전 비정규직만큼 대우하면 된다는 차별주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래도, 15년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하다 보니 희망이 보입니다. 순응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고비마다 함께 해온 선배 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견뎌내면 잘못된 길에 들어선 동지들도 용서됩니다. 즐기면서 정의로운 투쟁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끝내 승리한다는 것을 해본 사람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그로 보내주세요.

[반론보도문]
공공연구노조 카이스트지부는 위 보도 내용과 관련하여, “사용자로부터 교섭권한을 위임받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교섭에  나선 바 없다. 다만, 일부 조합원이 사측 교섭위원으로 나섰을 뿐이고, 이는 공공연구노조 카이스트지부와는 무관한 활동이다.

카이스트 시설관리직들 정규직 전환 당시 정규직 조합원들이 노조 가입을 거부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공공연구노조 카이스트지부는 시설관리직들의 노동조합 가입을 거부한 사실이 없다.”라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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