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언어적 장식으로 전락한 ‘자유’ ‘민주주의’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지난달 27일(현지시각) 미국 의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영어로 연설했다. 비교적 유창한 그의 영어 실력보다 관심이 간 건 연설 중 37번이나 쏟아져 나온 ‘자유’였다. 소속 정당을 막론하고 윤 대통령 연설에 함께 박수 치는 미 연방 상·하원 의원들도 눈길을 끌었다.
윤 대통령의 자유는 ‘프리덤’(freedom)이었다. 영어에는 또다른 자유 ‘리버티’(liberty)도 있다. 프리덤은 ‘개인의 의지대로 행위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리버티는 ‘개인의 의지대로 행위하는 데 억압받지 않을 권리’에 가깝다. 미국 독립선언문이나 미국 헌법 전문에 리버티는 나오지만 프리덤은 나오지 않는다. 프리덤은 수정헌법 제1조,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논하면서 한번 나오는 게 전부다. 결국 미국의 건국 이념에서는 절대적인 자유보다는 공동체 사회의 상대적 자유를 중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윤석열 대통령의 연설은 자못 흥미롭다. 예전 같으면 정치지도자가 저렇듯 열렬하게 프리덤을 강조하는 것은 곧 개인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지적으로 여겨졌다. 냉전시대 미국의 여러 대통령은 프리덤을 중심으로 소련을 비판했고, 최근에는 중국을 향한 비판에 종종 등장한다. 모르긴 몰라도 미 의원 중 윤 대통령의 프리덤이 북한을 두고 하는 지적이라고 여긴 이들도 꽤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프리덤은 북한과 관련 없는 부분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프리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했다. 보편적 가치에 관한 이야기인지, 한국과 미국이 공유하는 프리덤에 관한 지적인지, 아니면 다른 특정한 나라에 대한 지적인지 알기 어려웠다.
윤 대통령 연설 사흘 전인 4월25일 프리덤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연설이 있었다. 재선을 위해 2024년 선거 출마를 밝히는 짧은 영상 속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프리덤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프리덤을 위협하는 세력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주장은 어느덧 민주당의 상식이 됐다. 때문에 시간상으로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윤 대통령의 프리덤이 트럼프 같은 반민주적 세력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프리덤을 위협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여긴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공화당 쪽의 프리덤은 또 다르다. 이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여러 규제를 프리덤에 대한 억압으로 여겼고, 바이든과 민주당이 프리덤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공화당 의원들 역시 윤 대통령의 프리덤을 향해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박수쳤을 것이다.
바이든, 트럼프, 민주당, 공화당 모두 프리덤을 주장하고, 프리덤을 향해 박수를 친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치열한 정치적 갈등 상황 속에서는 자신들이 속한 집단은 선이며 반대 집단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태도를 갖기 쉽다. 매사를 선악의 틀로 보기 때문에 지지자나 유권자를 향해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이미지를 선점하고, 이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려고 한다.
그 무기로 채택되는 것이 ‘프리덤’만은 아니다. 윤 대통령 연설에서 18번이나 등장한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정가에서 바이든과 민주당, 트럼프와 공화당이 서로를 향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이라는 주장을 반복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정작 자신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밝히지도 않을뿐더러 오늘날 미국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갖는 여러 구조적 문제에 관한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누구에게나 듣기 좋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언어적 장식’처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윤석열 대통령의 연설에서 ‘프리덤’과 ‘민주주의’가 나올 때마다 미 의원들이 박수 치는 모습이 불편했다. 정치적 성향 때문이라기보다 그토록 중요한 말에 대한 이들의 이해가 너무나 얕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치적으로 치열한 갈등 상황에서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프리덤과 민주주의를 언어적 장식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그 의미와 중요성을 훼손하는 행위다. 이는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나아가 말을 악용하는 독재의 등장을 위한 언어적 토대를 만드는 행위일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의 연설이 끝난 뒤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미국만의 문제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불편한 심정은 앞날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졌다. 이런 나의 걱정이 그저 기우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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