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대통령제를 흔들고 있다
[세상읽기]
[세상읽기]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소셜코리아 운영위원장
“지지율이 아무리 떨어진다고 해도 미래를 위해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반드시 하겠다.” “지지율 1%가 나오더라도 할 일은 하겠다.”
역사와 시대의 무거운 책임을 홀로 지고 묵묵히 앞으로 걸어갈 것 같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장함과 담대함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했던 일을 되돌아보면 역사와 시대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반대로 우리는 지난 1년간 1987년 민주화 이후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낯선 대통령과 정부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민주화 이후 우리가 수십년 동안 아슬아슬하게 지켜왔다고 믿었던 암묵적 합의들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한국 사회는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일본과의 역사 문제는 5년짜리 단임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자신이 생각하는 국익을 명분으로 대다수 국민의 의지에 반해 선을 거칠게 넘었다. 노태우 정부 이래 수십년 동안 한국 외교정책의 기본 원칙이었던 ‘전략적 모호성’을 ‘전략적 명확성’으로 전환할 때도 대통령은 거침이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정책 전환이 우리와 지척에 있는 북한, 중국, 러시아를 적으로 만들어, 기업과 국민의 이익과 안위를 위협하는 일인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논리와 근거가 부족하거나 없어도, 대통령 한 사람이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는 ‘구국의 결단’만 하면, 대통령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욱이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구국의 결단’이란 것이 대통령과 정권의 이해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다. 경제를 민간 중심으로 운영하겠다는 약속은 정권 출범과 함께 사라졌다. 노골적으로 공기업 인사에 개입하는가 하면, 물가를 잡기 위해 기업을 압박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개혁을 회피했다며 문재인 정부를 무책임한 정부라고 몰아붙이면서 윤석열 정부가 추진했던 노동·연금·교육개혁은 불과 1년 만에 동력을 잃었다. 노동개혁은 ‘주 69시간’ 논란에서 보듯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저 노동조합을 때려잡는 것이 노동개혁의 유일한 목표처럼 보인다. 연금개혁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음 정부가 해야 할 일로 슬그머니 미룬 듯하고, 교육개혁은 해프닝으로 끝난 ‘만 5살 초등학교 입학’ 논란 이후 걸음조차 떼지 못했다.
대통령의 당무 개입 논란에서 보듯 대통령이 여당을 대통령의 하위 파트너로 강등시키면서, 정치적 갈등을 완화하는 완충재로서 여당의 역할도 사라졌다. 여당을 대신해 윤석열 대통령과 야당, 더 나아가 국민 사이에는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검찰, 감사원 등 사정기관들이 자리했다. 윤석열 정부 1년을 지내면서 우리가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우리가 직접 뽑은 대통령의 권력 앞에 너무나 무기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윤석열 대통령 개인의 문제일까? 아니면 대통령제가 문제일까? 어떤 사회적인 문제의 근본 원인이 제도인지 개인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사회과학이 오랫동안 풀지 못한 난제 중의 난제다.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제도는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제도가 쉽게 악용될 수 있고, 제도의 악용을 막을 장치가 없다면, 그 제도를 좋은 제도라고 할 수는 없다.
현행 대통령제가 그런 것 같다. 대통령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제도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 대통령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와 협력하지 않고도 마음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으며, 심지어 국민의 99%가 반대하는 정책도 추진할 수 있다. 대통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민주적 방법은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이지만, 이는 매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민주주의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 1년의 평가는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문제에 대한 성찰의 출발점이 돼야 하며, 그 성찰은 한국 민주주의의 대안 마련으로 이어져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푸념하기에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대내외적 위기가 너무나 심각하다. 대통령제를 유지할 수도 있고, 대통령제를 포함해 전면적 정치개혁을 모색할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이 대통령제의 정당성을 흔들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대통령제를 포함한 권력구조 개혁을 논의할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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