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구 장인' 동산이 평생 모은 근대미술 걸작 본다
기증작 209점 중 90점 전시
허백련 10폭병풍 '월매' 압도적
3인 합작도 '송하인물'도 장관
나비 한마리에 6시간 걸린
정은영 '모란과 나비' 눈길
1949년 그려진 좌우 156㎝의 동양화 '송하인물(松下人物)'엔 호(號)와 낙인이 세 점 찍혀 있다. 그림 중앙 소나무 이파리 옆에 한 점, 그 아래 비뚜름하게 누운 남성의 팔 옆에 또 한 점, 그리고 좌측에 글로 적힌 화제(화題) 아래 다시 또 한 점.
그러므로 이 그림의 주인은 세 명이다. 소나무는 정종여, 인물은 김기창, 화제는 이상범으로 막역했던 이들은 각자의 우주를 한 장의 그림에 뭉쳐내고는 자신이 붓을 댄 위치에 붉은 낙관을 찍었다.
'송하인물'을 비롯해 동산(東山) 박주환 선생이(1929~2020) 평생을 모은 동양화 컬렉션이 한자리에 모였다. 17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특별전 '동녘에서 거닐다:동산 박주환 컬렉션'을 이달 18일부터 내년 2월 12일까지 개최한다고 밝혔다. 과천관 2층 전체를 사용하는 대규모 전시로, 동산방 화랑이 3년 전 기증한 209점의 작품 가운데 회화 90점을 모아 소개하는 전시다.
전시관을 거닐기 전에 동산의 생애부터 가로지를 필요가 있다.
동산은 1961년 인사동에 표구사 동산방을 창업한 '표구 장인'으로 기억된다. 그림 테두리와 전면을 나무, 유리, 철제 등으로 장식해 안정화하고 상품화하는 표구(表具)는 회화의 조연으로 인식되곤 했다. 그러나 동산에게 표구는 기록되진 않을지언정 그림에 영원성을 불어넣는 예술이었다. 이후 그는 1974년 동산방화랑을 개업했고 전통회화와 근대미술의 발전을 지휘한 화랑계 '큰 어른'으로 기억된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허백련의 '월매'가 장관으로 펼쳐진다. 오랜 세월을 견딘 고목을 담묵으로 묘사한 병풍 작품이다. 거대한 매화나무가 오랜 세월을 견디며 강건한 가지를 뻗어내는데 '북풍이 불어 사람을 넘어뜨리는데, 고목은 변하여 거친 쇠가 되었네(北風吹倒人 古木化爲鐵)'란 좌하단 시구와 어우러지기에 간결한 먹선과 서정적인 여백을 오래 쳐다보게 될 만큼 압도적이다.
윤소림 학예연구사는 "병풍 작품은 각 폭마다 하나의 그림을 갖고 있어 이어놓으면 하나의 서사 구조를 이룬다. 그러나 허백련의 '월매'는 열 폭 병풍이 하나의 회화를 이루는 점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영찬의 '구미정(九美亭·1992)'은 강원 정선 임계면에 위치한 정자 구미정과 주변 절경을 그린 실경산수화다. 구미정은 문신 이자(1652~1737)가 지은 정자 이름이다. 평생을 기암절벽과 산봉우리를 찾아다녔던 이영찬의 집념이 돋보인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자 구미정 중앙에 한 남성이 아득한 산하와 강물을 망연하게 쳐다보고 있어 장엄한 자연과 왜소한 인간을 대비시킨다.
이용우의 '기명절지'는 고동기, 풍로, 탕관 등 생활용품을 그린 20세기 초 작품이다. 기명절지화란 근대미술의 영향을 받은 동양풍의 정물화를 뜻한다. 이 그림에선 가운데 물고기 한 마리가 유독 돋보이는데 설명에 따르면 어종은 쏘가리다. 쏘가리 궐자가 임금이 사는 궁궐의 궐(闕)자와 음이 같아 입신양명을 뜻했다고 한다. 궐어도의 한 종류인 셈.
정은영의 '모란과 나비'(1980년대 전반)에서 모란과 나비는 부유와 풍요를 상징한다. 작가는 나비 한 마리를 그리는 데 6시간이 걸릴 정도로 세밀하게 관찰하고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앞으로 뻗은 기다란 더듬이 아래로 몸체의 검은 털이 자세하다. 방금 펄럭인 날개에서 비늘가루까지 떨어질 듯 섬세하다.
송수남의 '자연과 도시'(1980년대 중후반)는 한국화의 새 방법론을 실험했던 '수묵화 운동'의 하나로 동산방화랑이 송수남 개인전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채색된 높은 건물을 가린 가로수가 수묵으로 표현돼 기묘한 느낌을 주는데, 전통과 현대를 한 장의 종이에 펼쳐냈다. 전시실 한 공간엔 송수남이 1978년 그린 흑백의 '산수' 한 점이 놓여 있다. 전통과 실험 사이를 배회했던 작가의 정신을 가늠케 한다.
이상범의 '초동'(1926)은 꼭 살펴야 할 작품이다. 서양회화에서 고안된 원근법이 사용된 절경의 작품으로 100년 전 작품이라곤 믿기지 않는 한국화다. 특히 동산 박주환 선생이 기증문화가 활발하지 않았던 1970년대에 재정난을 겪고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는다.
윤 학예연구사는 "기증작을 전시하기에 앞서 가장 놀랐던 점은 '초동'의 무게가 매우 무거웠다는 점"이라며 "1970년대 당대에만 표구에 사용됐던 두꺼운 유리, 그리고 무거운 액자틀이 그대로여서 반세기 전 표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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