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24시] 아무도 믿지 않았던 '가난'

김형주 기자(livebythesun@mk.co.kr) 2023. 5. 1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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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관심 없다고 하는 사람을 조심하세요. 그는 돈에 미친 사람입니다."

한 유명 강사가 말한 뒤 누리꾼들에게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으로 널리 사용되는 문구다. 세상에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돈에 초연한 사람은 구린 구석이 있을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구멍 난 3만7000원짜리 운동화를 신는다"며 가난한 청년 이미지를 연출하던 한 국회의원이 적극적인 가상화폐 투자로 60억원까지 자산을 키웠던 것으로 드러나 비난을 받고 있다. 이 의원은 이 같은 '가난 마케팅'을 활용해 지난해 지지자들에게 3억3014만원의 후원금(국회의원 중 1위)을 받은 적이 있어 더 논란이 됐다.

이 의원의 가상화폐 투자 자체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가 말했듯 개인의 이익 추구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익의 증가와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의원을 비롯한 한국 정치인들의 '가난 마케팅'이 국민을 기만한다는 것에 있다. 찢어진 구두를 언론에 노출한 전 서울시장, 가방 한 개를 30년 넘게 쓴다고 밝힌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 '가난 마케팅'의 역사는 유구하다.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에는 가난을 체험하기 위해 빈민굴에 들어온 부잣집 도련님이 나온다. 그와 동거하며 마음을 열었던 여공은 그의 정체를 알게 된 뒤 그가 자신에게서 가난을 훔쳐갔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평생 짊어져왔던 가난이 그에게는 한낱 유희거리로 소비됐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다수 국민은 이 의원의 기만으로 가난을 도둑맞지는 않았다. 정치인이 연출하는 가난을 사실로 생각할 정도로 국민들은 순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의원 사건에 국민들이 분노보다 조소를 보내는 것은 애당초 이 의원의 '연출된 가난'을 믿지 않았어서다.

국민이 가난을 도둑맞지 않는다 해도 '가난 마케팅'은 조속히 사라져야 할 행태다. 국민의 대표라고 뽑아놓은 사람들이 먹히지도 않는 위선을 떠는 것에 국민들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국민들이 이 의원에게 도둑맞은 것은 국격과 자존심이다.

[김형주 오피니언부 kim.hyungju@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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