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수묵, 인문적 은유로 다시 성찰하는 ‘5·18 정신’

도재기 기자 2023. 5. 1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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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가 김호석, 광주시립미술관서 ‘검은 먹, 한 점’ 회고전
역사화·인물초상·가족화 등 초기작~신작 60여 점 망라
작품세계 진면목 속 “이 시대 우리들 삶과 정신 성찰의 자리”
수묵화가 김호석 화백이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검은 먹, 한 점’을 열고 있다. 사진은 ‘오월의 눈물’(2023, 종이에 수묵, 195×135㎝).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여유롭게 꼭꼭 씹어야 제맛을 알 수 있는 음식이 있다. 찬찬히 살펴보며 생각의 깊이를 더해야 진의를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있다. 화면 속 가시적 형상 그 너머에 작가의 하고픈 말, 뜻이 담긴 작품들이다. 모호한 듯하지만 작가적 사유와 성찰, 화법, 인문학적 공부 등이 응축됐기에 그 뜻은 겹겹이 쌓였다. 다의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은 최근 덖은 해차처럼 여러 맛이 어우러져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 루쉰의 뜻을 새기듯 즐길 때 그 재미가 쏠쏠하다.

수묵화가 김호석(66)의 작품들도 관람객 저마다 다르게 읽을 정도로 다의적이다. 전통 수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대표작가로 평가받는 그의 작품에는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적 화면 너머에 치열한 이성적 서사가 녹아 있다. 인간이 하찮게 여기는 미물들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위선·부조리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화사함 속에 처연함이 있고, 유화가 줄 수 없는 수묵 고유의 단순·담백함으로 그림의 뜻은 더 확장된다.

김호석의 ‘키재기- 꿈꾸기’(1998-1999, 종이에 수묵채색, 185×238㎝).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 작가의 작품전 ‘검은 먹, 한 점’이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학생 시절 미술계 큰 상을 받으며 지금까지 주목받는 그의 40년 화업, 예술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전시에는 초기작부터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 등을 다룬 신작까지 60여점, 아카이브 20여점이 나왔다. 주제에 따라 ‘이 땅의 흔적’ ‘우리 시대의 초상’ ‘한 걸음 나아가’ ‘필묵(筆墨)의 울림’ 4개 섹션으로 구성돼 관람객을 맞는다.

전시회는 “검은 먹 한 점에 정신과 의미가 실린다면, 그 점으로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그려내고자 노력해왔다”는 작가의 말처럼 먹점 하나가 우주도, 땅도, 사람도, 삶과 죽음으로도 변모하는 실상을 잘 보여준다. 유화가 지배적인 한국 미술계에 현대적으로 재창조돼 되새김질할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수묵화의 향연이다.

대중적으로 김 작가는 배채법 등 전통 초상기법에 바탕을 둔 인물초상 작업이 유명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정약용, 성철·법정 스님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세계가 훨씬 더 넓고 깊다는 것을 새삼 알려준다. 왜 그가 교과서에 작품이 가장 많이 실린 작가인지를 알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한국 전통 수묵화의 새로운 모색으로 주목 받은 김호석의 ‘아파트’(1979, 종이에 수묵채색, 130×226㎝).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관람객은 전시장 들머리에서 한국 수묵화의 새 길을 모색하며 주목받은 초기 대표작 ‘아파트’(1979)를 만난다. 이어 1980년대 정치적 억압 속에 서민들의 삶을 굴비에 빗대어 그린 ‘굴비’(1985) 연작, 권력과 사회·인간의 부조리와 이중성 등을 파리·쥐 등으로 비유한 작품을 비롯해 1990~2000년대 다양한 작품들이 있다.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관람객이 놀랄 정도의 극사실적 묘사와 인문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한 특유의 은유적 표현이 돋보인다.

국내외 전시에서 호평 받은 김호석의 ‘황희’(1988, 종이에 수묵채색, 135×100㎝).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인물화들도 나왔다. 4개의 눈과 세상 불의를 깨려는 듯 거친 선으로 표현된 ‘황희’(1988)는 국내외에서 상찬이 쏟아진 작품이다. 단재 신채호의 정신을 담은 ‘단재 선생의 지조’ 등도 있다.

작가에게 역사의 주인공은 유명인물만이 아니다. 애써 참아내는 분노가 오히려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분노를 삭이며’를 비롯해 이 땅의 어머니를 표현한 ‘자식 잘되기만 바라면서 살지요’ 등 보통사람들을 다룬 작품에 관람객들의 눈길은 오래 머문다.

김 작가는 본인 가족의 일상적 모습에 삶의 희로애락과 사회상·시대상까지 투영하는 가족화 작업도 30여년째 계속한다. 가정의 화목함을 재미나게 드러낸 ‘키재기’, 노부부의 애틋함이 있는 ‘마지막 선물’, 전시 때마다 관람객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정신의 생’ 등이 출품됐다.

‘한 걸음 나아가’ 부문은 민주화운동 등 1980년 후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는 역사화가 중심이다. 동학농민운동, 4·19혁명, 1980~1990년대 민주화운동을 다룬 역사화 작업은 예술가로서의 역사의식·시대정신을 무겁게 여기는 그의 작품세계에 중요한 한 축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5·18민주화운동을 담은 작품들인 ‘광주민주화운동’(1997·국회사무처 소장)과 ‘광주민주화운동사’(2000·광주시립미술관 소장) 등을 비롯해 지금 이 시대의 ‘5·18 정신’ ‘광주 정신’을 되새겨보는 신작들을 선보여 주목받는다.

김호석의 ‘표적’(2023, 영점사격 총탄지들에 수묵담채, 204.5×165.5㎝).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신작 ‘표적’은 작가가 20여년 전 어렵게 구한 영점사격 표적지들을 이어 붙여 그 위에 수묵담채로 5·18 당시를 담아낸다. 총탄 구멍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표적지와 시민군들의 결의에 찬 표정이 대비된다. ‘기억되지 않는 기억’은 한지 위에 M16 총탄 구멍을 섬세하게 표현했는데, 자세히 보면 탄착군을 형성하고 있어 조준사격을 부인하는 관련자들을 꼬집는다.

이들 작품이 직설적이라면 ‘모기는 동족의 피를 먹지 않는다’ 연작, ‘오월의 눈물’ ‘대가 난다’ ‘새 길’ ‘그날’ 등은 작가 특유의 은유가 두드러진다. 자세히 볼수록 꽃잎, 물, 대나무 등에 녹여낸 상징과 은유가 다층적 해석을 낳고 또 그만큼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김호석의 ‘모기는 동족의 피를 먹지 않는다 1-1’(2023, 종이에 수묵담채, 각 143×74㎝, 위)과 각 작품의 세부 모습(아래). 광주시립미술관·도재기 선임기자

‘모기는 동족의 피를 먹지 않는다’ 연작은 시민들을 쏜 모기만도 못한 권력의 불의를 은유하면서 더 나아가 차별과 혐오·배제에 매몰된 이 시대 인간상을 비판한다. 떨어진 꽃잎 등을 소재로 삼은 ‘오월의 눈물’ 등은 5·18 희생자는 물론, 역사적으로 민주·인권·정의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불의에 맞선 이들의 뜻, 정신을 왜 되새겨야 하는지를 각성시킨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광주 정신은 민주주의, 인권, 대동세상 등 여러 숭고한 가치를 내포하지만 저는 정의를 떠올린다”며 “그 숭고한 가치와 의미들을 보다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게 더욱 필요한 시대”라고 밝혔다. 이번 작품전은 작가로서의 회고전이지만 ‘5·18 정신’을 깊게 성찰해보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전시는 우리 사회와 삶에서의 희망·정화와 치유 등 의미를 담은 작품, 인간과 자연의 근원·본질을 천착한 작품, 작가의 작업 노트 등 아카이브로 구성됐다. ‘타는 물’ ‘죽음도 삶도 아닌’ ‘내 안의 너 이상의 것’ 등 작품이다.

특히 대나무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신작 ‘대나무’는 김 작가가 여전히 치열한 연구와 작업으로 예술적 화두를 파고들고 있음을 드러낸다. 광주비엔날레와 함께 막을 올린 전시는 8월13일까지다.

김호석의 ‘대나무’(2022, 종이에 수묵, 141×145㎝).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검은 먹, 한 점’ 전시장 전경 일부. 도재기 선임기자
김호석의 ‘대가 난다’(종이에 수묵담채, 198×135㎝, 왼쪽)와 ‘생성( 종이에 수묵채색, 72×105㎝).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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