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당체제·맹목적 지지 … 합의가 안 되는 한국 만든다
◆ Big Picture ◆
국제정세와 기술 등 여건이 급변하면서 우리의 빠른 대처가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변화는 쉽지 않다. 기득권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기득권층과의 합의를 요구한다. 그래서 국가의 성패는 미래 대비 변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합의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① 시민사회 : 유연한 유권자, 미합의 시 상황을 중시하는 개인
합의가 어려울 때 시민사회의 여론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이해당사자의 기득권을 얼마나 인정해야 할지, 혹은 어느 정당이 무리한 주장을 펴는지 알아야 한다. 이러한 국민의 판단을 언론, 학계, 시민단체 등이 도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전문가는 중립적 심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편향적 사고로 이념 양극화를 부추기는 경향마저 있다. 중립지대를 자처하는 전문가들은 곡학아세(曲學阿世)하거나 책임 모면용 양비론을 편다. 심판 노릇을 하려면 판단기준이 중도적이어야 한다. 중도파란 논리 없이 좌우의 중간에만 서는 사람이 아니다. 사안별로 A건은 좌파가 맞고 B건은 우파가 맞는다고 판단해 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심판은 좌우에서 모두 배척받기 쉬워 잘 키워지지 않는다. 합의를 하려면 심판을 키워야 한다.
정당을 심판하는 것은 유권자이다. 미합의에 대한 책임이 많은 정당은 표를 잃어야 한다. 그러자면 유권자의 표심이 정당의 행태에 따라 유연하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정당에 대한 묻지마 지지자가 늘고 있다. 맹목적 지지의 배경은 과거엔 지역이었으나 이제는 이념까지 가세하였다. 소속감 상실의 시대에 불안해진 유권자가 정당에 소속감을 느끼면서 편향성은 강화된다. 탈진실(Post-truth), SNS도 이를 부추긴다. 국회입법조사처, 국회예산정책처에서 팩트체크 기능을 수행할 것을 제안한다.
맹목적 유권자에게 상대 정당은 악(惡)이므로 상대 당에 대한 양보를 인정하지 않는다. 맹목적 유권자가 지배하는 정당은 일부를 양보하고 합의하기보다는 합의를 무산시키는 편을 택한다. 그 결과는 강행 처리 아니면 변화 무산이다. 유권자가 한 정당을 무조건 지지하기보다는 객관적인 평가를 내린 후 한 표를 행사해야 정치가 바뀐다. 선생님이 한 학생이 맘에 든다고 시험 성적과 무관하게 무조건 좋은 점수를 주면 그 학생이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겠는가?
설문조사에 나타난 우리의 무당층 비율은 대략 3분의 1 정도이다. (그림) 무당층 유권자는 대부분 투표율이 낮다. 지난 네 번 대선에서 무당파와 비무당파의 투표율은 평균 19%포인트 차이였다. (가상준, 2022) 총선 투표율은 더 차이가 클 것이다. 무당층 투표율로 정당을 심판해야 정당이 합의를 하게 된다. 현재 투표일을 공휴일로 하고 있는데 투표 사실을 직장에 제출한 경우에만 휴일로 인정해주자.
협상문화도 합의에 중요하다. 가장 큰 문제는 합의 결과를 목표와 비교하는 사고방식이다. 합의 결과는 목표가 아니라 미합의 시 상황(BATNA·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과 비교해야 한다. 예컨대 대일관계에 대한 우리의 목표는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우호적 한일관계이며, 일본과 미합의 시 상황은 현상 유지이다. 정부가 그리는 한일관계가 목표에 미달한다고 비판하기보다는, 현상 유지에 비해 나은지를 물어야 한다. 합의안이 목표에 미달한다고 합의를 안 하면 합의안보다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더 높은 목표를 위해 합의를 안 하는 것이 낫다는 문화가 우리에겐 존재한다. 목표 달성이 가능하다는 낙관을 하게 되면 합의는 어려워진다. 이러한 낙관 경향은 민주주의 역사가 짧아 미합의 시 상황(BATNA)이 경험, 판례로 축적돼 있지 않은 탓이 크다. 협상에 임할 때는 미합의 시 상황을 냉정히 따져 보아야 한다.
② 정치 : 양당제 극복하고 국회의장의 권한 강화해야
대통령제는 합의를 어렵게 만든다. 여야가 대통령에 대한 지지로 나뉘어 싸우기 때문이다. 여당이 대통령 편만 들고 야당은 대통령 흠집만 내려 해서는 국회에서 합의가 있을 수 없다. 문제 해결의 시작은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합의 없이 강행 통과된 법안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겠으나, 여야가 합의한 결과는 존중해야 한다.
양당제 역시 합의를 어렵게 만든다. 양당제에선 잘하려 애쓰기보다는 상대 흠집 내기가 더 효과적이다. 반면 A, B, C, 세 당이 있다면 A에 대한 지지가 떨어질 경우 B, C는 그 반사이익을 누리기 위해 서로 경쟁하게 된다. 또 B가 A와 C 사이의 심판 역할도 할 수 있다. 이런 다당제가 가능하려면 먼저 비례대표 의석을 더 늘려야 한다. 비례대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극복하려면 비례대표 선정에 국민의 뜻을 더 반영하길 권한다.
아울러 위성정당을 금지해야 한다. 2020년 총선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으나 두 정당은 위성정당을 만들어 양당제를 지켰다.
양당제가 강성 팬덤 정치와 결합하면 합의는 어려워진다. 지금 여야 모두 극단적인 강성 지지층이 전당대회 등 정당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당은 이러한 강성 지지층을 집회 등에 활용한다. 전당대회에 해당 정당을 지지하는 일반 국민의 뜻을 더 크게 반영해야 한다. 그러자면 유권자가 소수의 강성 지지층이 지배하는 정당을 외면해 주어야 한다. 말 없는 다수 유권자가 힘을 보여야 한다.
국회는 의석 비율을 고려한 합의를 추구해야 한다. 의석 비율이 6대4라면 양측 의견을 6대4로 반영한 타협안을 만들어야 한다. 안건마다 다수결로 다수당의 의견이 관철된다면 40% 국민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게 된다. 다수당이 횡포를 부리며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려고 하는지, 소수당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지는 결국 유권자가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사안별로 이를 지적하는 적극적인 조정자(調停者)가 있어야 한다. 국회의장이 그 일을 해주어야 한다. 직권상정 등 국회의장의 권한을 강화하자.
미합의 시엔 다수결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2012년 도입된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해야 한다. 총선을 앞둔 지금이 법 개정의 호기이다. 이 법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사실상 봉쇄하고 안건조정제, 필리버스터를 도입하는 대신 패스트트랙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이 법은 합의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미합의 시 다수결이 기다리고 있어야지 변화가 무산되어선 안 된다. 급변하는 세상은 신속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다수당의 전횡은 국회의장이나 대통령이 막고, 다음 총선에서 유권자가 심판할 일이다.
③ 정부 : 지방분권하고 총괄조정력을 키워야
합의가 안 되는 중요한 이유는 합의 역량도 없는 중앙정부가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전체를 바꾸는 것은 항공모함을 유턴시키는 것과 같이 어렵다. 합의 형성의 단위를 지방으로 내려야 한다. 그러면 합의가 쉬워진다. 지방이 변화를 주도하면 그 편익이 주민에게 더 직접적으로 구현되고, 지자체 간 경쟁심이 작동하여 변화에 대한 주민의 지지를 얻기가 쉬운 반면 이해당사자의 반발은 분산된다. 아울러 지자체장은 임기가 최대 12년으로서 5년 단임 대통령에 비해 안정감 있게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 광주형 일자리도 전국 단위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저임금, 근로시간, 규제 개혁 등도 지자체에 결정권을 주어야 한다.
정부 내 합의 형성 절차도 문제이다. 주무 부처는 기득권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국무회의에는 주무 부처가 안건을 상정하므로 스스로 고칠 생각이 없는 의제는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이런 셀프개혁으론 변화가 어렵다. 그래서 타 부처에 정책 변화를 요구하는 개혁 주도 기관이 있어야 한다. 과거 김대중 정부의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 노무현 정부의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이명박 정부의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정부에는 이런 기능이 없다. 향후 개혁 주도 기관을 신설한다면 타 부처 관련 의안을 국무회의에 제출할 권한도 부여해야 한다. 그러면 주무 부처가 개혁 주도 기관과 합의를 이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처 간 이견에 대한 총괄조정력 부재도 합의를 어렵게 한다. 국무총리는 힘이 없다. 기획재정부를 2008년 이전의 기획예산처, 재정경제부 체제로 분리하고 기획예산처를 총리실 소속으로 하여 총리의 조정을 지원케 하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총리의 조정으로도 합의가 안 되면 결국 대통령실에서 결정해 주어야 하는데 이는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대통령 수석비서관도 소관 부처에 따라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필자의 주관적 평가로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결정에 적극적인 반면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은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결정에 소극적인 대통령일수록 부처 간 합의를 강조한다. 그러면 각 부처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침해하는 사안에 대해 끝까지 합의를 안 해주면 변화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버티게 된다. 부처 간 합의를 유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합의가 안 되면 대통령이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메시지이다. 대통령의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대통령, 국무총리, 대통령 비서실장의 3자 비공식 회의를 국무회의 직전 정례화하길 권한다. 대통령이 결정을 해주어야 부처 합의도 쉬워진다.
④ 사안별 합의 형성 전략
사안별로 전략을 잘 구사해야 합의가 쉬워진다. 합의를 요하는 개혁과제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전체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며 찬반이 팽팽히 맞서는 사안이다. 탈원전이 그 예다. 이러한 사안은 국회 합의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5년마다 바뀌는 행정부 결정에 비해 국회 합의는 지속성도 높다.
둘째, 국민 전체에게 도움이 되지만 국민은 체감을 하지 못하고 그 개혁으로 손해를 입는 계층은 강력하게 반발하는 사안이다. 규제 개혁, 보조금 개혁이 그 예다. 이때 손해를 입는 계층과 합의를 하려면 적절한 보상도 필요하다. 그래도 남는 기득권층의 반발을 극복하고 개혁을 성사시키자면 여론의 지지가 핵심이다.
셋째, 국민이 원치 않으나 미래 대비 꼭 필요한 개혁도 있다. 연금개혁이 그 예다. 인기보다는 역사의 평가를 중시하는 대통령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거기에 국민의 동의를 얻어내는 리더십까지 결합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그 일을 해내었다. 합의를 통해 변화를 이루어내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선 대통령, 정부, 국회, 시민사회, 우리 모두가 달라져야 한다.
[박진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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