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시:선(詩:選)]기억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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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환한 얼굴이 있다.
주소나 전화번호는 물론이거니와 약속도 사람의 이름도 외우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가 나의 시집을 한 권 골라서 가져오고 있다.
다행히도 그가 내민 시집의 면지를 펼쳤을 때에 섬광처럼 그의 이름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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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있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이 있는 채로/ 무엇이 있다/ 이름을 모르는 채로/ 내가 있다// 나는 골똘해지고/ 무엇도 덩달아 골똘하다// 수수께끼를 내지도 않았는데/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며칠 후 이름을 떠올린 채/ 허무해지는 내가 있다 ’ - 오은 ‘그것’(시집 ‘없음의 대명사’)
서점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환한 얼굴이 있다. 아는 얼굴이다. 반가워서 벌떡 일어났다.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 혀끝을 맴맴 도는 자음 몇 개만 더듬다가 결국, 이름을 생략한 채 안부를 건넨다. 이게 얼마 만인가요. 잘 지냈지요. 그가 살 책을 고르기 위해 책장 앞에 선 다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기억해보려고 노력한다.
깜빡 잊는 것, 잃어버리는 것은 나의 천성이다. 숙제를 잊고 물건을 잃고 많이도 혼났지만 고쳐지질 않는다. 그러나 요즘 내가 느끼는 기억력 감퇴의 원인은 기억의 사용과 관계돼 있다. 어릴 적만 해도 친구들 집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주소나 전화번호는 물론이거니와 약속도 사람의 이름도 외우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어떤 질문을 두고 먼저 스마트폰을 꺼내 드는 것이 자연스럽다. 기억해보려거나 추리해보려는 노력 따위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을 ‘편리’라고 해야 할지 ‘의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용하지 않는 기능은 감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큰일이다. 그가 나의 시집을 한 권 골라서 가져오고 있다. 서명을 청해올 텐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름이 어떻게 되었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도 그가 내민 시집의 면지를 펼쳤을 때에 섬광처럼 그의 이름이 스쳐 지나간다.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나는 여유로운 척 그의 이름을 적으며, 사람의 무궁한 능력에 새삼 감탄을 하고 만다.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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