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에서 '차르'가 되기까지…권모술수의 대가 푸틴
KGB·암흑가와 결탁…화려한 기만전술로 권력 독점한 냉혈한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을 때 블라디미르 푸틴은 허겁지겁 소련으로 귀향했다. 동유럽의 친소련 정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지자 소련도 안전하지 못했다.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거세졌고, 권력은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손가락 사이에서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국가보안위원회(KGB) 소속으로 독일 드레스덴에서 러시아 제2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푸틴은 낭인이나 마찬가지 신세였다.
그러나 늘 변화의 흐름에 민감했던 그는 공산당 보수파 대신 민주주의 운동에 편승할 방법을 찾았다. 당시 인민 대표회의 구성원으로 선출된 정치계의 샛별 갈리나 스타로보이토바에게 접근한 그는 "운전기사로 일하겠다"고 제안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대신 모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총장 보좌관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는 당시 유명 연설가 중 한명인 솝차크 법학과 교수가 있었다. 법대 출신이었던 푸틴은 그의 밑으로 들어갔고, 솝차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에 당선됐다. 솝차크의 총애를 받던 푸틴은 시 해외 관계 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됐다가 부시장으로 승진하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캐더린 벨턴 로이터통신 기자가 쓴 '푸틴의 사람들'(원제: Putin's People)은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말까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발자취를 중심으로 복잡다단한 러시아 현대사를 조명한 책이다. 공산권의 멸망, 러시아의 민주화와 옐친의 부상, 올리가르히(신흥재벌)의 성장과 몰락, 그리고 밑바닥부터 올라온 푸틴과 그의 KGB·마피아 동료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엮었다. 혼란스러운 시대의 공기를 세밀하게 담은 데다가 난세에 등장한 여러 인물의 명멸을 매끄러운 이야기로 전한다는 점에서 눈길이 가는 책이다. 900쪽에 달하는 이른바 '벽돌책'이지만 술술 읽힌다.
푸틴은 정치 중심지 모스크바가 아니라 주목을 덜 받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나씩 실력을 쌓아갔다. KGB 동료들은 버팀목이 돼 주었고, 마피아는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숍차크 시장이 명성을 좇을 때 푸틴과 그 동료들은 항구를 접수했고, 지역의 가장 큰 국영기업을 집어삼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항구를 이용해 수출하려는 올리가르히 일부도 포섭했다. 푸틴의 앞날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숍차크 시장이 시장 선거에서 낙선하자, 푸틴도 사직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한달가량 쉰 후 그의 발걸음은 권력의 중추 크렘린을 향했다. KGB 출신 모스크바 권력자들이 그의 행보를 그간 예의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개 공직자로 밑바닥에서부터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역시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습니다…그러나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일 뿐입니다.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활동 막바지에 이르러 크게 성장했습니다."(겐나디 벨리크 장군)
KGB 지도부를 등에 업은 푸틴은 크렘린 해외자산부 책임자를 거친 후 1년 뒤 지역 담당 행정 제1부시장, 그로부터 3개월 뒤 KGB 후신인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수장이 됐다. 그야말로 아찔한 상승이었다. 그는 당시 옐친 대통령 일가를 수사하던 스쿠라토프 검찰총장의 섹스 비디오를 언론에 공개하며 총장을 거꾸러뜨리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푸틴의 존재는 여전히 미미했다. KGB 주류가 차기 대통령으로 미는 프리마코프 총리, 크렘린과 대립하며 입지를 키우던 루시코프 모스크바 시장, 그리고 민영화 과정에서 거대 공기업을 집어삼키며 러시아를 쥐락펴락하고 있던 올리가르히의 눈에 푸틴은 아직 "애송이"에 불과했다.
루블화 폭락에 따른 국채 모라토리엄 선언, 가족의 부패 스캔들, 나라의 부를 거덜 낸 올리가르히의 대두 속에서 지지율 5%의 대통령 옐친의 건강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KGB 출신 정치인들은 옐친을 "술에 취한 어릿광대"라고 여겼으나 그도 한때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승부수를 던졌고, 정가는 깜짝 놀랐다. 푸틴을 총리로 임명한 것이다.
옐친의 눈에 푸틴은 충직하고 순종적인 듯 보였다. 다른 KGB 출신 관료들과는 달리 시장과 민주주의 원칙을 지켜나갈 것처럼 느껴졌다. 숍차크 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에 대해 끝까지 충성을 보인 점도 높은 점수를 얻었다. 옐친은 푸틴을 통제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자신이 이룩한 민주화와 자유의 유산을 이어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푸틴은 뼛속까지 KGB의 DNA를 가진 전체주의자였다. 단지 필요에 따라 옐친과 그 무리를 기만했던 것뿐이다. 그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 공격하는 스포츠인 유도의 달인이었으며 KGB 시절에 배운 대화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기술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즉 그는 권모술수와 기만전술의 대가였다. 푸틴의 적수가 되기에 옐친은 늙고 병약해진 상태였다. 푸틴은 '옐친 패밀리'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득권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푸틴의 뒤에는 '실로비키'라고 불리는 KGB 출신 이너서클과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의 마피아들이 득실댔다. 그들은 정치부터 경제까지 러시아의 모든 권력을 독점해 나갔다. 푸틴은 권력을 잡았을 때만 해도 자기는 고용된 관리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곧 러시아 전체의 지배주주가 됐다. 한 재벌은 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푸틴은 곧 차르, 모든 땅을 가진 황제인 겁니다."
열린책들. 박중서 옮김. 880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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