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의 진짜 얼굴
1895년 명성황후는 경복궁에서 일제에 의해 시해돼 시신이 불태워졌다. 그는 조선 말 어떤 존재였기에 참혹한 비극을 겪었을까.
1873년 고종은 궁궐 안 깊숙한 북쪽에 건청궁을 지었다. 1873년은 고종이 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선언한 해이기도 하다. 건청궁 건립은 고종의 정치적 자립의 의지로 해석되기도 했다. 책을 읽다 문득 이곳에 가보고 싶었다. 곤녕합은 건청궁 건물 중 하나다. 명성황후가 생활공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1895년 황후가 일본인 자객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0월 8일 새벽 6시경이었다.
황후의 나이는 44세였다. 어떤 국가든 타국의 황후를 살해하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을미사변 후 전국에서는 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에 저항하는 의병이 일어났다. 이를 을미의병이라고 한다. 황후는 어떤 존재였기에 이런 참혹한 비극을 겪어야만 했던 걸까.
뚜렷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
그런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왜 황후를 시해하게 됐을까. 그가 나쁜 인물이었다면 을미의병까지 일어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이희주의 '명성황후 평전’은 바로 이러한 황후의 삶과 정치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책이다. 내게는 황후의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1883년 부임한 초대 조선 주재 미국 특명전권공사 루시어스 푸트의 부인인 로즈 푸트는 황후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푸트는 황후를 만나기 전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 폐쇄적 사고의 소유자라거나 지식을 사적인 권력 쟁취에만 이용하는 권력 집착형 인물, 사치스러운 인물 등 당시 황후에 대한 풍문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푸트는 황후를 만나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푸트는 남편과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일본 천황 비의 대접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황후에 대한 험담을 듣고 "황후는 고귀하고 고상하며 열정적인 성품을 지녔고, 조선을 일으키려는 열망을 가졌다"고 반박했다. 연세대를 세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의 부인이자 황후의 어의(御醫)였던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는 황후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약간 창백하고 아주 가냘프며 어느 정도 뚜렷한 얼굴과 명석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그는 언뜻 보기에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어느 누가 보기에도 그 얼굴에서 보이는 힘과 지적이고 강한 성격을 읽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상상이 가능한 묘사다. 당시 정세를 고려하면 황후는 외국인들에게 친절했을 것이다. 따라서 외국인들은 황후에 대해 우호적인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여러 기록을 보면 그가 지적이고 강한 여성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망국의 책임이 황후에게 있나
황후를 둘러싼 논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2가지다. 첫째는 황후의 가문에 관한 것이다. 시아버지 대원군이 외척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미한 가문에서 고종의 배우자를 골랐다는 건 제법 알려진 이야기다. 이에 이희주는 이의를 제기한다. 황후는 대원군의 부인과 같은 여흥 민씨 가문이다. 이 가문은 고려 때부터 명망이 높았다. 태종의 비이자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를 배출했다. 두 왕후는 조선시대 왕후들 가운데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이다.
황후의 고향은 경기도 여주 근동면 섬락리다. 1남 3녀가 모두 죽고 막내딸 황후만 살아남았다. 8세 때 아버지 민치록은 세상을 떠났지만, 황후는 양반계급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학문하기를 좋아했고, 유교 경전부터 역사서까지 폭넓은 서적을 섭렵했다. 고종 역시 황후를 추모해 지은 '어제행록(御製行錄)’에서 왕비의 자리에 올라 자신을 도운 것이 평상시의 공부에서 비롯되었다고 술회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그 사람이 명문가 출신이냐 아니냐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 출신을 문제 삼은 의도다. 특히 일본이 황후를 한미한 가문의 여성으로 놓아두려 했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시아버지와의 권력 다툼에 집착하는 탐욕의 화신으로 황후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자기 나라의 침략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황후의 정치 관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황후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두 군데서 나왔다. 하나가 당대 유학자들의 평가다. 유학자들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부터 '조대비’로 불리기도 했던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왕후까지 이어진 수렴청정을 부정적으로 봤다. 전통사회의 강력했던 가부장주의를 생각하면 명성황후가 정사에 관여하는 것이 유학자들의 눈에는 결코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봐야 할 것은 조선이라는 전통사회에서 황후가 떠맡은 이중적 역할이다. 사적으로 황후는 고종의 아내이자 순종의 어머니다. 동시에 남편을 도와 왕실과 종묘사직을 지켜야 하는 공적인 역할이 부여돼 있었다. 아들 순종에 대한 과보호와 같은 개인적 행위, 고종의 친정 체제 구축과 같은 정치적 행위는 황후의 이런 이중적 정체성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대원군과 황후의 갈등 관계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11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 21세가 됐는데도 대원군은 국정 운영권을 넘기지 않았다. 고종은 1873년 친정을 선포했고 대원군은 하야했다. 이 과정에서 황후의 개입 여부는 정사(正史)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황현과 박은식 등 유학자들의 기록은 황후가 고종에게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종은 정말 황후의 말대로 움직여진 존재였을까.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권력 갈등이라기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권력 갈등이 역사적 사실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황후가 영민했던 사람인 만큼 남편인 고종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전통사회에서 남편이 버젓이 있는데 부인이 권력을 좌지우지했다는 것은 석연찮다. 고종 자신이 강한 친정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기록을 주목할 때, 황후에 대한 당대 유학자들의 평가에 여성을 비하하려는 가부장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황후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또 다른 원인은 식민사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의 망국은 기실 내외 요인이 결합돼 발생한 것이다. 내적으로 국왕으로서 고종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제국주의는 결국 조선을 식민화했고, 이 식민화 과정을 정당화하려는 식민사관을 만들어냈다. 식민사관의 핵심은 조선이 허약한 나라라서 식민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식민사관은 고종을 무능한 통치자로, 명성황후를 국정 농단자로 묘사함으로써 고종과 명성황후의 행위를 망국의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하려고 했다. 망국의 책임에서 고종과 황후가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만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것이다.
황후의 외교 감각
이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주춤하는 사이 조선은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황후의 아이디어였다. 고종은 '어제행록’에, 외국과 교섭하는 문제에서 황후가 권유한 수원정책(綏遠政策)을 듣고 외국 사람들도 감복했을 정도라고 기록했다. 수원정책이란 먼 나라를 가까이하는 외교 전략이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청일전쟁을 거치며 커져온 청나라와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등의 서양 세력에 다가서려고 한 것은 당시 현실적인 외교정책이었을 것이다.
정상적인 역사는 주체성과 개방성에 의해 진행돼야 한다. 역사학자 한영우가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에서 한 말이다. 둘 사이의 균형감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전통을 지키려는 척사파는 개방성을 잃었고, 변화를 추구하는 개화파는 주체성을 상실했다. 고종과 황후가 선택한 길은 주체성과 개방성의 균형이었다. 자기 나라를 멀리하고 서양 세력을 가까이하려는 수원정책이 황후의 생각이었음을 일본이 몰랐을 리 없었고, 이는 결국 황후 시해의 배경이 됐다.
고종은 1895년 5월 25일 일본의 훈련을 받고 왕궁을 감시하던 훈련대에 맞서 국왕 호위군 시위대를 창설했다. 10월 7일에는 훈련대 해산을 명령했다. 그다음 날인 10월 8일 새벽 앞서 말했듯 일본은 황후 시해를 자행했다. 시신은 건청궁 동쪽 녹원으로 운반돼 불태워졌다.
황후의 장례식은 1897년 11월 21일에 국장으로 치러졌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아관파천이 끝나고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을 선포하자마자 한 일이었다. 황후의 죽음이 대한제국을 여는 하나의 계기가 됐던 역사적 사실을 통해 당시 황후의 위상을 보여준 셈이다.
어머니로서의 명성황후
시인 김수영은 시 '거대한 뿌리’에서 비숍의 책을 인용하며 "천하를 호령하는 민비는 한 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썼다. 왕의 부인으로 나랏일을 좌지우지했다고 알려졌지만 황후 역시 남존여비라는 시대적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내이자 어머니 이전에 여성으로서 황후 본래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서로 다른 시각에서 극단적 평가를 받아온 만큼 황후의 본모습을 파악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과도한 민족주의로 황후를 미화시키고 싶지 않다. 황후를 '조선의 국모’라고 일컫는 건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낯설기도 하다. 그러나 풍전등화의 역사적 대전환기에 서서 조선을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황후의 노력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황후의 삶 역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자랑스러운 역사도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도 우리의 현재를 떠받치는, 김수영의 말대로 '거대한 뿌리’다. 두 얼굴을 갖고 있었다 해도 황후는 분명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황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좀 더 객관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다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황후를 다시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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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스1 뉴시스 동아DB
사진제공 신서원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1970년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어른의 인생 수업’이 있다.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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