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편 제작 답습 안일함이 한국 영화 위기로… OTT와 ‘한몸’처럼 상생할 것”[현안 인터뷰]
올 한국 영화 매출점유율 30%이하
팬데믹 첫해에도 못미쳐 충격
개봉 못한 ‘창고영화’만 110편
관객 눈높이 못맞춰 반응 싸늘
대기업은 영화제작 사실상 중단
대체재였던 OTT가 흐름 주도
홀드백기간 줄여 기금조성 독려
지금은 영화 역사상 대전환시기
기존틀 깨고 발전 계기 마련돼
“이대로면 당장 내년 설 연휴에 극장에 내걸 한국 영화가 없습니다. 사상 최악의 위기 상황이란 말도 부족해요.”개봉 시기를 잡지 못하고 쌓여 있는 ‘창고 영화’만 110편이 넘고, 현재 제작 중인 영화는 8편에 불과하다. 관람객이 보지 않는 단계를 넘어 선보일 영화의 싹이 말라가고 있는 게 한국 영화의 현 상황이다. 그런데 지난 8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교육지원센터에서 만난 박기용 영진위 위원장은 ‘대전환’과 ‘기회’란 말을 수십 차례 반복했다. 영진위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리즈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그의 말엔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필요하다는, 영화는 극장이나 OTT 같은 플랫폼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영상예술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한국 영화는 얼마나 위기인가.
“한마디로 역대급 최악의 위기다. 올해 한국 영화 매출액 점유율은 30%가 채 되지 않는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첫해였던 2020년에도 45% 수준을 유지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징후는 있었다. 위기를 너무 늦게 깨달은 것 아닌가.
“영화계의 많은 사람이 엔데믹을 기다렸다. 극장에 가는 두려움만 없어진다면 팬데믹 이전처럼 사람들이 극장에 올 줄 알았다. 막상 엔데믹이 됐는데 관객들이 극장에 돌아오지 않으니까 다들 당황하고, 충격에 빠졌다.”
―개봉 시기를 잡지 못하는 창고 영화가 얼마나 되나.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제작비 30억 원 이상 되는 영화만 80편 이상 쌓여 있다. 10억 원 미만의 저예산 영화까지 합하면 110편 이상 된다. 여기에 잡히지 않는 독립영화들도 있을 테니 이 숫자보다 많을 거다.”
―요즘 한국 영화가 개봉하면 “또 창고 영화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관객들은 눈치가 빠르다. 만든 지 1년만 지나도 오래됐다는 느낌을 주는데, 2∼3년 지난 영화는 바로 느껴질 거다.”
―영화가 창고에 쌓여 있으니, 신작 제작도 부담스러울 것 같다.
“심각한 문제다. 현재 제작 중인 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한국 영화가 8편밖에 안 된다. 더구나 대기업이 제작하는 영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상 영화 제작이 중단된 상황이다.”
박 위원장이 말한 대기업은 CJ ENM, 롯데, 쇼박스, NEW 등 국내 4대 투자배급사를 말한다. 극장 개봉용 영화 기획을 OTT 시즌제 드라마로 돌리고 있다는 사실은 충무로에선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자칫 잘못하면 올해 크리스마스나 내년 설 연휴에 극장에 내걸 한국 영화가 없을 거다. 올해보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상황이 심각하다 보니 홍콩 영화의 몰락에 비견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홍콩 영화 몰락의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매번 흥행하다 보니 ‘어떻게 만들어도 관객들은 보겠지’란 나태함. 두 번째는 중국 반환에 따른 제약의 문제. 한국 영화도 1990년대 말부터 성장만 해왔다. 너무 잘되다 보니 좀 안일해진 것 같다.”
―어떤 점에서 안일했던 걸까.
“지난해의 경우 히트한 영화들은 대체로 속편이었다. 홍콩 영화도 뭐 하나가 잘되면 계속 비슷한 걸 만들었고, 결국 식상해졌다. 우리로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정신 차려야 한다.”
―티켓값 1만5000원 시대와 맞물리면서 한국 영화는 돈값을 못 한다는 인식이 다시 생겼다.
“올해 상반기 일본 애니메이션의 성공은 극장에서 볼 만한 영화가 있다면 관객은 극장에 온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 이상 코로나19 탓만 할 수는 없다. 한국 영화도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한다. 계속 하던 대로 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체질 개선이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이게 백 억짜리 영화라고?’란 관객들의 반응에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잘될 때를 기준으로 영화를 만들 게 아니라 달라진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팬데믹 동안 우리는 극장에 가지 않았고, 대체재였던 OTT의 존재는 이제 영화 산업 전반에 쓰나미를 일으키고 있다. 박 위원장은 “영화를 극장 밖에서 보는 것이 일상화된 지금의 흐름을 인정해야 한다”며 “영화 역사적으로 대전환의 한복판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전환이란 어떤 의미인가.
“팬데믹을 거치면서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것이란 개념이 깨졌다. 그렇다면 영화인들도 극장 개봉 영화만 영화란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대다수는 극장에서 보는 걸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 텐데.
“극장, OTT, 인터넷TV(IPTV) 중 어디서 영화를 볼지는 관객이 선택할 문제다. 극장에서 볼 영화와 극장 외 영화를 제작 단계에서부터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극장 영화와 극장 외 영화를 기획 제작 단계에서부터 구분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을까.
“아니다. 필요하다. 지금은 극장 개봉이 여의치 않을 때 OTT나 IPTV를 차선책처럼 여기는데, 그렇게 해선 예산도 비효율적으로 쓰이고 관객들의 실망을 불러일으킨다.”
―영진위가 OTT를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맞다. 영화가 영상 산업의 근간이란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OTT 시리즈는 분명 영화다. 심지어 웹툰도 영화와 분리하기 어렵다. 웹툰의 컷과 컷은 영화의 콘티 느낌이 있다. K-콘텐츠가 발전하기 위해선 이들을 영화와 아울러 고민할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최근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동행했던 박 위원장은 넷플릭스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는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꼬를 틔웠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OTT 포섭에 진심 같다.
“5월 말에 넷플릭스 코리아 관계자를 만나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찾을 계획이다. 티빙, 왓챠, 웨이브 등 한국 OTT 관계자들도 만나려고 한다. 이제 영화 산업과 OTT는 한 몸과 같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OTT의 존재가 영화 흥행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나. 홀드백 기간이 짧아진 점이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거론되는데.
“극장에 개봉해서 OTT, IPTV, TV로 방영되기까지 영화의 가치 사슬 구조가 팬데믹을 거치면서 깨졌다. 전통적인 홀드백 개념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극장과 OTT, IPTV가 상생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어쩔 수 없다는 얘기로 들린다.
“프랑스의 경우 넷플릭스가 영화발전기금 같은 부담금을 내는 대신 홀드백 기간을 줄여줬다. 우리의 경우에도 개봉촉진기금 조성에 OTT나 IPTV를 참여시키려면 홀드백 기간을 줄여주는 당근이 필요한 것 아닌가.”
―OTT에 풀리는 기간이 짧아지면 장기적으로 극장엔 악영향을 줄 텐데.
“그런 점도 고려해야 한다. 프랑스의 사례를 무조건 따라간다는 건 아니고, 시장 상황에 맞게 논의해야 한다.”
영화 위기와 맞물려 박찬욱, 한재림, 이병헌 등 감독과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등 유명 배우들은 앞다퉈 OTT로 향하고 있다. 박 위원장은 “창작자들보다 심각한 문제는 스태프의 이탈이다. 영화에 비해 OTT 시리즈가 제작 기간이 길어 스태프들에게 훨씬 안정적이다. 그래서 이분들에게 현재 하는 걸 포기하고 다시 영화 제작에 참여하라고 강요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영진위는 인력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올해부터 ‘신규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영화가 OTT와 병행한다는 의미에 대해 더 설명해 달라.
“쓰나미가 밀려오는데 그걸 막을 수 없다면 자기 몸을 거기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보면 영화 역사 120년 동안 무성에서 유성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진화했다. TV가 대중화되면서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에 대응하기 위해 사운드 시스템이 획기적으로 개발됐다. 3D나 아이맥스도 대응의 일환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위기도 영화 발전의 계기가 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영화는 영원할 테니까.”
―어떤 발전의 계기인가.
“극장에서 5회차 상영을 하기 위해 지금 같은 2시간 내외의 러닝타임이 표준이 됐고, 거기에 맞게 스토리텔링이 발전됐다. 극장 개봉이란 제약이 사라진다면 러닝타임에 대한 제약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런 제약이 하나둘 없어지면 영화의 언어가 달라질 거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나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 같은 시리즈도 사실상 영화에 포섭되긴 한다.
“그렇다. 1910년 초반부터 1920년대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시리즈 영화가 유행했다. 당시 신문 연재소설이 인기를 끌었는데, 그 포맷으로 영화를 만든 거다. 2시간 정도 되는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무너지면서 다양한 영화가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마지막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싶다. 관객들은 극장과 OTT 구별 없이, 한국 영화와 외화 구별 없이 볼 만한 영화를 보면 된다. 그렇다면 왜 한국 영화를 살려야 하는가.
“한 나라의 영화 수준은 그 나라의 국격과 직결된 문제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작품상을 받으면서 K-무비가 세계에서 톱 클래스로 대우받는 시절이 왔다. 다시 오기 힘들 시절이다. 이 골든타임을 놓치면 한국 영화는 다시 변방에 놓이게 될지 모른다.”
영화계엔 개봉·제작 지원금, 관객엔 티켓값 할인… 금전적 ‘당근책’ 고심
■ 한국 영화 위기극복 협의체 출범
한국 영화의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영화진흥위원회를 중심으로 ‘한국 영화산업 위기 극복을 위한 협의체’가 만들어진다. 한국 영화의 위기를 고민하고, 필요한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에서 본질적인 해법은 ‘돈’으로 귀결된다. 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티켓값 인하도 이뤄질까. 박기용 영진위 위원장에 따르면 누구보다 상황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있는 극장이 어떤 형태로든 ‘당근책’을 내놓을 전망이다.
영진위는 지난 3월 말부터 4월 말까지 한 달 내내 ‘한국 영화산업 위기 대응을 위한 긴급 실무 간담회’를 진행했다. 간담회에서 나온 액션 플랜 실행을 위해 ‘한국 영화산업 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 실무 협의체’를 이달 구성했다. 영진위는 물론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 실무 대표, 투자배급사 실무 대표, 제작단체 실무 대표 등 10명 안팎으로 이뤄졌다. 세부사항을 정리한 뒤 오는 6월 ‘한국 영화산업 위기 극복을 위한 협의체’를 출범해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낼 방침이다.
박 위원장은 “코로나19 기간 개봉하지 못한 ‘창고 영화’를 개봉할 수 있도록 개봉촉진지원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굉장히 많이 나왔다”며 “제작촉진지원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컸다”고 말했다. 그 밖에 ‘OTT 홀드백 질서 재정립’ ‘2주 개봉 보장’ 등의 의견도 나왔다. 또 영화계가 나서 대국민 메시지를 내자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박 위원장은 “우리나라 관객이 여태까지 한국 영화를 키워서 이렇게 성장했는데, 우리가 더 잘하겠으니 앞으로도 계속 함께해 달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개봉촉진지원금과 제작촉진지원금은 정부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상황. 박 위원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억 원 정도가 필요하다”며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2의 스크린쿼터제’라 불릴 정도의 전폭적인 지원 방안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정부의 관심, 무엇보다 대통령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영화 관람을 촉진하기 위한 티켓값 인하도 끊임없이 거론되는 방안 중 하나. 박 위원장은 “누구보다 극장이 현 상황의 심각성을 가장 절감하고 있다”며 “티켓값 인하를 포함해 조조할인, 요일별 할인, 계층별 할인 등 다양한 할인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 조만간 조치를 하리라 본다”고 말했다.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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