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위해’ 살던 소녀, ‘날 위해’ 사는 여걸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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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걸그룹의 메시지가 달라지고 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과거 걸그룹의 노래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상에 초점을 맞춘 반면, 요즘은 의존적 여성상을 배격하는 분위기"라면서 "여성 인권과 독립적 삶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지며 각성하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고, 이런 흐름이 글로벌 음악 시장의 중심이 된 K-팝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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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핑클 등 1세대 노래 가사
청순·섹시 콘셉트 여성상 강조
아이브·에스파·아이들 등 4세대
주체적·독립적 성향으로 변화
K-팝 타깃, 글로벌 무대로 커져
누구나 공감가능한 메시지 추구
여성팬 늘며 ‘걸크러시’ 강세
“난 오직 너를 위해 살고 싶어.”(SES·1997년)
“다른 문을 열어 따라갈 필요는 없어 넌 너의 길로 난 나의 길로.”(아이브·2023년)
K-팝 걸그룹의 메시지가 달라지고 있다. 주로 사랑을 테마 삼아 섹시 혹은 청순 콘셉트로 획일화된 여성상을 강조하던 과거와 달리 4세대에 접어든 걸그룹들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다. 이는 사회 변화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팬들에게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며 팬덤을 공고히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1세대 걸그룹 SES의 데뷔곡은 ‘아임 유어 걸’(I’m your girl)이었다. “난 오직 너를 위해 살고 싶어 / 나를 향한 네 모든 걸 간직할게 / Cause I’m your girl. 너를 닮아 가는 내 모습 지켜봐 줘”라는 가사는 다분히 의존적이다. SES의 라이벌이었던 핑클의 히트곡 ‘내 남자친구에게’도 “이것 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이쁘다고 말해봐 /솔직히 너를 반하게 할 생각에 난생처음 치마도 입었어”라고 외치거나, “언제나 나를 지켜줄 너라고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해줘”(영원한 사랑)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를 취했다.
반면 MZ 세대로 구성된 4세대 걸그룹 세계관의 중심은 ‘나’다. 지난해 미국 빌보드 관계자가 뽑은 2022년 최고의 K-팝에 선정된 ‘톰보이’(TOMBOY)에서 걸그룹 (여자)아이들은 “사랑 그깟 거 따위 내 눈에 눈물 한 방울 어림없지 / 너의 하찮은 말에 미소나 지을 바엔”이라고 일갈했다. 이 곡에 대해 칼럼니스트 제프 벤저민은 “쉬운 길을 택하는 대신, 팀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강렬하고 솔직한 메시지로 전 세계 리스너들을 사로잡았다”고 평했다. 15일 미니 6집 ‘아이 필’(I feel)로 컴백한 (여자)아이들도 일관된다. 멤버 전원이 작사·작곡에 참여해 여성의 ‘자존감’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타이틀 곡 ‘퀸카(Queencard)’는 겉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라 충고한다. 리더 전소연은 “‘나는 나를 너무 예뻐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데뷔 후 줄곧 자신감, 당당함과 자기애(나르시시즘)를 강조한 걸그룹 아이브가 최근 발표한 정규 1집의 타이틀 곡 제목은 아예 ‘아이엠’(I am)이다. “넌 그냥 믿으면 돼 / I’m on my way 보이는 그대로야 / 너는 누군가의 Dreams come true”라며 두 발로 서라고 충고한다. 리더 안유진은 “앞서 발표한 음악이 사랑에서 나르시시즘을 표현했다면, 이번에는 사랑이 매개가 아닌 주체적인 삶을 주제로 노래했다. 이 부분을 주목해달라”고 당부했다.
이 외에도 ‘넥스트 레벨’에서 “난 절대 포기 못해 / I’m on the Next Level /저 너머의 문을 열어”라고 외치던 에스파는 지난 8일 3번째 미니앨범 ‘마이 월드’를 발표하며 보다 밝은 분위기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앞서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특정 콘셉트를 강요받아 앨범 발표가 늦춰졌던 에스파가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한다는 측면에서 또 하나의 알을 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메시지의 변화는 K-팝 걸그룹을 둘러싼 환경적 변화와 맞물려 설명할 수 있다. K-팝 그룹이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삼으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다 보편타당한 메시지에 몰두하는 분위기다. 이런 보더리스(borderless)와 더불어 ‘걸그룹은 남성이 좋아한다’는 편견을 깨는 젠더리스(genderless) 개념까지 강화되며 주체적인 여성을 여성이 응원하고 지지하는 걸 크러시(girl crush)가 강세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과거 걸그룹의 노래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상에 초점을 맞춘 반면, 요즘은 의존적 여성상을 배격하는 분위기”라면서 “여성 인권과 독립적 삶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지며 각성하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고, 이런 흐름이 글로벌 음악 시장의 중심이 된 K-팝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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