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틀콕에도 그랜드슬램”···2023년, 천재 안세영의 꿈이 시작된다[창간 특집 인터뷰]
한국 배드민턴 에이스 안세영(21)은 중학교 때 태극마크를 달고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다. 만 15세, 역대 배드민턴 최연소 국가대표로 등장한 이후 꾸준히 성장해 한국 여자단식의 기둥이 되었다.
한국 배드민턴은 여자 단식에서 방수현 이후로 국제종합대회 우승이 없었다. 올림픽은 1996년 애틀랜타에서, 아시안게임도 1994년 히로시마에서 방수현이 금메달을 딴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명맥을 이으려 많은 스타들이 도전해 세계무대 상위권에서 활약했지만 금메달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물러났다.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그 꿈은 이제 안세영의 꿈이 되어 있다.
안세영은 타고난 셔틀콕 재능에 ‘천재’라고 불리며 등장했다. 그러나 목표를 설정하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쉴 때는 뭐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막히는 ‘노력형 선수’다. 패배를 하면 다시 일어서 도전하고 또 도전해 결국 이겨내는 ‘오뚝이’ 같은 선수 이기도 하다.
2023년은 9월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있다. 한국 스포츠의 모든 시선이 쏟아지는 이 대회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노메달,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는 여자복식 동메달 1개를 따는 데 그쳤던 한국 배드민턴이 명예 회복에 도전하는 대회이기도 하다.
안세영은 그 중심에 서 있다. 지난 3월 배드민턴 오픈 대회 중 최대 메이저대회인 전영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해 1996년 방수현 이후 27년 만에 한국에 금메달을 안기며 2023년을 힘차게 출발했다.
스포츠경향은 창간 18주년을 맞이해 안세영과 함께 꿈에 대해 이야기 해 보았다. 중국 쑤저우에서 지난 14일 시작된 세계혼합단체배드민턴선수권대회(수디르만컵)를 준비하기 위해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훈련 중이던 안세영은 “모든 대회를 다 한 번씩 우승하는 기록을 남겨 모두가 ‘배드민턴’ 하면 안세영을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2023년은 그 출발점이다.
■도쿄올림픽 그 이후
안세영은 2년 전, 도쿄 올림픽에서 여자단식 8강 탈락 뒤 펑펑 울었다. 3년 동안 하루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독하게 훈련했지만 또 같은 상대, 천위페이(중국)에게 져 4강 진출에 실패한 만 19세의 안세영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안 되는 거면,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겠죠?”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엄마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고 하셨는데 아직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계속 도전해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던 안세영은 국제무대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이후 가로막혔던 가장 큰 벽을 이제는 훌쩍 넘어섰다.
천위페이는 안세영에게 ‘천적’이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1회전에서 그를 만나 0-2로 져 탈락했고 첫 올림픽에서도 8강에서 무릎 꿇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달라지고 있다. 무려 7전 전패로 밀리던 안세영은 지난해 7월 말레이시아 마스터즈 대회에서 처음으로 꺾은 천위페이를 이제는 계속 꺾고 있다. 올해는 1월 말레이시아 오픈 준결승에서 2-1로 이긴 뒤 3월말 전영오픈 결승에서 2-1로 꺾고 우승한 데 이어 4월말 아시아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다시 만나 2-1로 승리했다. 최근 3연승을 거두며 상대전적을 4승8패로 만들었다.
안세영은 “아시안게임 첫판에서 그 선수에게 졌기 때문에 올림픽에서도 분명 만나겠다 생각해서 진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운동했는데도 이기지 못하니 그때는 눈물이 나왔다”며 “이제는 그런 생각을 마음에서 떨쳐낸 것 같다. ‘천적’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천적을 연파하면서 안세영은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었다. 코트 안에서 가장 필요한 무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안세영은 “전에는 나를 못 믿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면서 왜 그런 너 자신을 못 믿느냐’고 할 정도로 자신감이 없었다. 천위페이를 한 번, 두 번 이기면서부터 그 부분이 달라졌다. 하면 진짜 된다는 것을 느꼈기에 이제 못 이길 선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앞으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도 그런 선수를 이겨야 내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태극마크 6년째, 아픔과 영광을 여러 번 경험하며 성장한 안세영은 자기관리의 노하우도 얻었다. 안세영은 “전에는 그저 무조건 많이 뛰고 좋다는 것은 다 했는데 경험을 통해서 이제는 내게 필요한 것을 확실히 알고 운동한다. 이제는 전처럼 무식하게 운동하지는 않는다”고 웃었다.
■전영오픈 그 이후
전영오픈 우승은 안세영의 많은 것을 바꿔놨다. 가장 큰 무대에서 천적을 이긴 자신감과 함께 ‘방수현 이후 처음’이라는 부담과 책임도 현실로 안겨주었다. 안세영이 따낸 금메달은 방수현 이후 전재연, 성지현 등 세계랭킹 상위에 랭크된 강자들이 도전했어도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중학교 3학년에 성인 선수들을 제치고 국가대표에 선발된 뒤 언젠가 여자단식의 세계 제패 꿈을 이뤄주리라 했던 모두의 기대가 전영오픈 우승으로 진짜 거대한 가능성으로 바뀌었다.
커진 기대에 체감하는 영광은 안세영에게 어느 정도 부담과 책임감을 키워주고 있다. “언젠가는 내리막길을 탈 것이라는 사실이 지금 가장 큰 고민이다. 그때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느라 잠을 못 잘 때도 있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안세영에게는 훌륭한 ‘멘토’가 있다. 지난해 은퇴하고 지도자로 변신해 현재 국가대표 여자단식 선수들을 지도하는 성지현 코치다. 안세영 바로 전에 여자단식의 가장 큰 스타였던 성지현 코치야말로 ‘방수현 이후 처음’이라는 부담을 선수 생활 내내 안고 도전했던 주인공이다.
안세영은 “그런 부담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데 성지현 코치님이 많이 얘기해주신다. ‘네가 가져가야 할 숙제는 맞지만 그걸 생각하고 있기에는 할 일이 많다’고 ‘하루씩, 한 게임씩만 생각하면서 해라.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거기에 빠져들지 말라’고 하셨다”며 “부담이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올해 목표는 내가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는 경기를 하자는 것인데 잘 되고 있다. 나는 멘털이 강한 편이다”고 웃었다.
■내 꿈은 셔틀콕의 그랜드슬램
안세영은 “‘배드민턴, 하면 안세영’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모두에게 롤모델이 될 수 있는 꽉 찬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성실함과 함께 길이 남을 성적이 동반돼야 한다면 올해, 2023년이 그 출발점이다.
안세영은 “테니스에서 4대 메이저대회를 다 우승하면 그랜드슬램이라고 부르듯이, 나도 그럴 수 있을만한 타이틀을 갖게 되는 것이 최종 목표다. 모든 급 대회를 전부 우승해보는 것이 꿈인데 이제 가장 큰 3개 대회만 남았다”고 말했다.
배드민턴에서 오픈 대회는 ‘BWF(세계배드민턴연맹) 월드투어’라는 이름으로 슈퍼 100, 300, 500, 750, 1000시리즈까지 5개 등급으로 나눠 열린다. 그 중 가장 큰 대회인 1000급 대회 전영오픈을 우승해 만 21세에 전부 우승한 안세영은 지난해 ‘왕중왕전’인 월드투어파이널까지 제패했다. 이제 세계(개인)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 그리고 올림픽이 남았다.
한국 배드민턴 역사상 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를 모두 석권해본 선수는 남자복식의 박주봉-김문수, 짝을 바꿔 혼합복식을 모두 제패한 김동문뿐이다. 방수현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1993년 영국 버밍엄 대회 준우승이 최고 성적으로, 단식에서는 이 3개 대회를 모두 우승해본 선수가 아직 없다. 안세영의 꿈은 한국 배드민턴 최초의 꿈이기도 하다.
그 중 2개 대회가 올해 열린다. 8월 덴마크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9월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열린다. 내년 열릴 파리올림픽을 위한 올림픽 랭킹포인트 레이스는 5월에 시작됐다. 한꺼번에 다 이루기는 어렵겠지만 하나씩 깨 나갈 출발점이 바로 2023년이다.
안세영은 “올림픽 레이스가 시작됐으니 어느 정도 안정권을 만들어놓은 뒤 아시안게임 전에 있는 세계선수권 대회를 먼저 목표로 하려고 한다. 다가오는 것들을 하나씩 잘 해치워나가는 것이 목표”라며 “갈 길이 멀다. 금메달은 누구나 원하는 목표로 삼고 열심히 하지만, 나는 훈련을 많이 할수록 자신감이 그만큼 같이 생긴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무기인 것 같다”고 웃었다. 한국 배드민턴의 역사를 향한 안세영의 발걸음이 시작됐다.
진천 | 김은진 기자 muldero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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