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살 수 있다면[편집실에서]
누구는 반지하 단칸방에 살고 누구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초고층 펜트하우스에 삽니다. 누군가 무료급식소에서 한 끼를 해결할 때 누군가는 고급한정식집에서 코스요리를 즐깁니다. 여관비가 아까워 바들바들 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저 없이 오성급 호텔에서 묵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도 일등석과 비즈니스, 이코노미 클래스로 나뉘고 KTX를 타도 일반실과 특실로 나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가격에 따라 곳곳에서 서비스의 품질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있기는 있습니다. 시간이 대표적입니다. 특실을 탄다고 목적지에 더 일찍 도착하지는 않지요.
요즘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이 떠들썩합니다. 상식을 깬 파격과 실험적인 기법으로 ‘미술계의 악동’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데요. 무료 전시인 데다 바나나를 은색 테이프로 미술관 벽에 붙여놓고선 예술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괴짜 작가’의 스토리가 입소문을 타면서 관람 인파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온라인 사전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컴퓨터 앞에서 틈만 나면 ‘광클’을 시도해보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이처럼 선착순 예약 앞에서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조건은 무용지물입니다. 예약조차 받지 않는 맛집에서는 힘깨나 쓰는 자나 약자 모두 줄을 서야 겨우 음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아이폰 신제품을 사겠다고 매장 앞에서 밤을 새우고,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명품매장으로 돌진합니다. 명절을 앞두고 표를 사려는 귀성객들의 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명의를 만나 진료를 받겠다고 전국에서 몰려든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대형 병원, 주말이면 가족단위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놀이공원도 인간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대표적인 공간입니다. ‘빽’을 동원해 순서를 가로채고 암표가 기승을 부리며 웃돈을 줘가면서까지 사람을 고용해 대신 줄을 서게끔 해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특수한’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보편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다수는 속절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서울시가 어린이를 동반하면 박물관·미술관·공연장 등 시립문화시설과 잠실종합운동장 등 시립체육시설을 우선 입장토록 하는 내용을 담은 ‘서울 어린이 행복 프로젝트’를 최근 발표했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울며 보채는 자녀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던 부모들로선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지만, ‘노키즈존’ 논란처럼 찬반 의견이 맞섭니다. 국내 대형 놀이공원들이 이미 시행 중인, 돈만 더 내면 인기 놀이기구를 바로 탈 수 있는 ‘프리미엄 서비스 이용권’을 두고서도 가격에 따른 자연스러운 차이라는 시각부터 시간까지 돈을 내고 사도록 이끌어서 될 일이냐는 볼멘소리까지 견해가 분분합니다. 정희완 기자가 이른바 ‘매직패스’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복잡한 시선을 이번 호에서 다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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